쌈지노이아, 쌈클레이아

스물두 살의 내 삶은 교회에서 만난 이들과 얽히고설켜 '교회가 나'고 '내가 교회'인 것 같은 생활이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자연스레 친해지다 보니, 내 아래로 동생 세 명, 위로 형 세 명인 모임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문제의 '그러니까요' 모임의 시작이다.

그중 한 동생이 '쌈지'라고 불리는 나의 모교회의 살아 있는 전설! 이 녀석은 우주만큼이나 특이한 인물이라서 매번 예기치 못한 기쁨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었다.

절대 '픽션이 아닌'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해 보겠다. 쌈지가 수능을 보고 지원한 대학에 면접을 보러 갔다. 수도권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대학이었는데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갔나 보다. 쌈지의 차례가 되어 면접관이 쌈지에게 물어봤다. 

"자네 우리 대학에는 어떻게 왔는가?"
"흠… 그러니까… (쌈지는 말이 어눌한데 항상 이 '그러니까'라는 부사를 붙인다) 신길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그러니까 ○○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걸어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 … … …."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겨울왕국에 온 듯 얼어붙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정말 온 장기가 뽑아져 나올 만큼 웃었다. 

그리고 한번은 어느 성탄절에 쌈지가 교회를 못 나온 적이 있다. 심한 감기 몸살이 걸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서 교회를 못 나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래서 쌈지와 친한 동생 한 명이 성탄절 예배를 마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컴퓨터를 켜고 메신저에 접속을 했는데, 역시나! 쌈지가 네이트온에 접속해 있어 걱정 반 놀람 반으로 그 동생이 쌈지에게 물었다. 

"쌈지 형. 몸 좀 괜찮아?"
"온몸이 아파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당."
"많이 아픈가 보네. 근데 형 온몸이 아파서 움직일 수 없다면서 지금 네이트온은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흠… 그러니까 손가락은 몸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우리 모두는 온 장기가 뽑아져 나올 만큼 웃었다. 아무튼 이 쌈지라는 인물의 특이한 스토리는 무궁무진하다. (쌈지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뜨거운 박카스'와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가 진짜 재밌지만 다음 회에 소개해 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맛보기 정도만 소개해 드리고!) 나를 비롯한 쌈지와 친한 사람들은 예수님 이야기를 몇 박 며칠씩 하기는 힘들지만, 쌈지 이야기라면 일주일 내내 할 수 있었다. 쌈지와 함께 살아온 우리 '그러니까요' 멤버들은 쌈지라는 이름만 들어도 엄청 재미있어하겠지만, 혹시나 그런 마음이 조금 덜 든다면 20대 시절 교회에 한 명쯤 있을 법한 쌈지 캐릭터를 지닌 그 사람을 생각하면 더욱 공감이 되시리라!

이렇게 특별한(?) 쌈지 덕분에 우리는 만나면 서로의 신앙이나 속마음을 얘기하기보다는 쌈지 이야기하기에 바빴다. 그러다 보니 '코이노니아' 가 아닌 '쌈지노니아'를 나누었고, 우리 공동체는 '에클레시아'가 아닌 '쌈클레시아'가 되어 가고 있었다.

▲ 삶도 나누고 말씀도 나눈 모임 '그러니까요' 멤버들. 우리 집에서 몇 번 모임을 하면서 멤버들은 내 설교에 콧방귀를 뀌기 시작했다. "설교만 잘하면 다냐" 하고 말하면서. (사진 제공 김정주)

"설교만 잘하면 다냐?"

이런 방향으로 가다가는 '쌈지교'가 생길 것 같아서 어느 날 형들이 극단의 조치를 취했다. 함께 모여서 쌈지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서로의 신앙에 대해 나누고, 기도 제목과 말씀도 나누고, 기도도 하자는 취지에서 경건 모임을 만들었다. 이름을 뭐라고 할까 고민하던 중에 쌈지가 말을 할 때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를 연발하니 모임 이름이 '그러니까요'가 된 것이다. 신학생이기도 하고 그 모임에서 내 나이가 딱 중간이라서 내가 '그러니까요' 모임의 리더로 세워졌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매주 '그러니까요' 모임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여 찬양도 몇 곡 부르고 삶을 나누고 기도도 했다. 찬양 리더는 쌈지였는데, 쌈지가 찬양을 인도하면 은혜보다는 웃음을 참기에 바빴다. 한번 웃음이 터지면 신사도운동스럽게 웃다가만 끝나는 모임이 되곤 했다.

신학생인 나는 이 모임이 귀한 자리인 만큼 '신학생스럽게', 제법 그럴싸한 말씀을 준비해 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임은 점차 자리를 잡아 갔다. 처음에는 교회에서 모이다가 마땅히 모일 공간이 없어서 우리 집에서 모임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은 아둘람 공동체처럼 자연스레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곳이 되었다.

그렇게 모임이 자리를 잡아 가는 동안 말씀을 잘 준비해서 전한다는 생각이 나 스스로 들었다. 제법 두꺼운 책도 참고하고, 특별히 해석한 본문을 나누기도 하고, 알지도 못하는 원어를 갖다 쓰는 허세를 부리기도 하면서 한창 나르시시즘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나날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모임은 진행되었고, 나는 언제나처럼 준비한 말씀을 전했다. 준비한 내용을 매끄럽고 진지하게 잘 전했다고 생각하며 으쓱해하고 있는데 모인 사람 중에 다소 진보적인(?) 동생 한 명이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설교만 잘하면 다냐! 형네 엄마랑 할머니한테나 좀 잘해라!"

'토르'가 들고 다니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뭐 이런 종교개혁 시절이었다면 화형당할 소리가 다 있나?' 어이가 없었지만 당시 나와 어머니의 관계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찔리는 말이었다. 모임을 밖에서 할 때는 나의 사생활을 몰랐던 녀석들이, 이제 우리 집에서 모이면서 나의 행실을 다 알아 버리고 나니 그 겉만 번지르르한 설교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힘든 나날이 시작되었다. 내가 아무리 화려하게 본문 해석을 하고,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을 갖다 붙이고, 각종 영적인 조미료를 쳐도 그 동생을 비롯한 다른 한 동생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심령에다가 캡틴아메리카 방패를 하나 세워 놨는지 말씀이 전혀 들어가지를 않았다. 심지어 이 녀석들 중 한 명은 내가 설교를 하는 동안 아멘이 나올 타이밍에 맞춰 '뿡!' 하고 방귀를 뀌면서 나를 조롱했다. 그때 나는 "이 자식아, 구약시대 같았으면 너는 똥꼬에 벼락을 맞아서 죽었을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 녀석은 조롱하듯이 '쉬이익' 하면서 남은 가스를 유유히 흘려보냈다.

괴로웠다. 나의 삶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나의 설교가 통하지만, 나의 삶을 구석구석 아는 사람들에게는 나의 설교가 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갠다고 하였는데, 이 녀석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듯했다. 도망치고 싶고, 이 녀석들이 모임에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쓸데없이 신실해서 우리 집에 한두 시간 전에 이미 와서 빈둥거리면서 모임을 기다렸다. 

캡틴아메리카 방패가 뚫리는 역사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그때부터 설교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설교는 잘 전하는 것 이상의 신비가 담겨 있는 영역이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끼치나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끼칠 수 없는 설교자라면 나는 분명 가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씀을 '어떻게 하면 잘 전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보다, '어떻게 하면 내가 그 말씀을 붙잡고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면서 딱 산 만큼만 전하려고 힘썼다. 잘 살았으면 잘 산 대로, 못 살았으면 못 산 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진솔하게 오픈했다. 아니, 사실은 오픈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다 알기 때문에 감출 수가 없었다.

설교 시간에 방귀나 뀌고 엄마에게나 잘하라고 핀잔을 주던 그 녀석들을 통해 나는 점점 변화되어 갔다. 그리고 놀라운 일들이 조금씩 일어났다. 내가 변한 만큼 이 녀석들도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삶 속에서 말씀을 붙잡고 경건하게 살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일 그때에야 내가 전하는 설교에 힘이 실렸다. 어머니를, 할머니를, 동생을 대하는 태도들이 달라질 때에야, 내가 전하는 설교에 힘이 실렸다. 그 힘이라는 것이 '솔'에다가 맞춘 웅변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혀에서만 나오는 설교가 아닌 삶으로 살아 낸 설교는 마침내 그 녀석들의 캡틴아메리카 방패를 뚫어 내고 심령에 도달하기에 이르렀다.

머리에서 나온 말은 그 사람의 머리까지
가슴에서 나온 말은 그 사람의 가슴까지
삶에서 나온 말은 그 사람의 삶까지

그때 깨달은 이 진리는 내가 설교를 하는 데에 영원히 잊지 못할 지침이 되었다. 그렇게 '그러니까요' 모임은 7년가량 지속되었다. 내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잠시 모임이 무너진 적도 있지만 제대 후 재건해서 시즌2와 시즌3을 거쳐 아름다운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바로 그 7년의 세월 동안에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목회와 설교에 대해 정말 많은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장 설교하기 어려운 나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설교함으로써, 가장 사랑하기 어려운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기도함으로써 말이다.

그러니까 스물두 살부터 스물아홉 살까지 '그러니까요' 모임을 하며, 그러니까요 멤버들과 함께 마음속으로 되뇌었던 말이 지금 내가 섬겨야 할 영혼을 향한 내 마음이 되었다고나 할까.  

주중의 보이지 않는 삶보다
주일에 보이는 한 번의 설교가 더 훌륭했다면
그건 낮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러나 

주일에 보이는 한 번의 설교보다
주중의 보이지 않는 삶이 더 훌륭했다면
그건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내 안에 있는 것이 50도 안 되는데
1000 이상을 주려고 하니까
힘들어진다

내 안에 있는 것이
1000 이상이 될 때에
아무리 못해도 50은 그냥 넘는다 

짜내면 힘든 거고
넘치면 쉬운 거다

하나님께서 '그러니까요' 모임 7년을 통해 내 마음속에 깊게 새겨 주신 교훈, 김파전! 비록 어제보다 오늘 더 삶이 버거워도 힘을 내어 살아간다. 오늘 하루의 삶의 무게보다 더 큰 무게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니!

※이번 화에는 연극 티켓 나눔 이벤트가 있습니다(클릭).

▲ 김파전의 2030 미생들의 이야기는 매주 화요일 업데이트됩니다. (그림 제공 이현숙)

글쓴이는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송파구의 한 교회에서 '파전'(파트타임 전도사)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동년배 직장인으로 치면 비정규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84년생 서른두 살의 김파전. 비록 전도사님이라 불리지만 세상살이는 '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김파전이 자신의 세대인 2030들이 위로받아야 할 교회에서조차 미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조금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신학과 이론으로 내린 정답과 같은 '제자도'가 아니라, 2015년 대한민국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젊은 크리스천들이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삶의 제자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삶의 제자도'란 말은 멋지지만 사실 실제 삶은 김파전의 '파전행전'일 수밖에 없지만요. 

김파전의 이야기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2030세대들이 겪고 있는 리얼한 삶입니다. 어렵고 힘든 미생의 삶이지만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행복을 발견해 가는 이야기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제목은 파트타임 전도사(파전)의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행전)라는 뜻으로, '파전행전'이라 지었습니다. 매주 화요일 한 편씩 업데이트됩니다. - 편집자 주  

*김파전의 페이스북 www.facebook.com/mukhyan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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