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논픽션으로 '내가 과연 결혼할 수 있을까? 내가 과연 결혼을 해도 될까?'라고 고민하는 3포 세대, 5포 세대들에게 '나 같은 죄인 결혼시키신 주 은혜 놀라워'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쓴 글입니다. - 필자 주 
이현숙)

결혼을 하기 전에 사실 나는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결혼이라는 골리앗 앞에 나는 다윗이 아닌 사울이었다. 신앙이라는 좋은 갑옷도 입었고 신학이라는 좋은 칼도 차고 있었지만, 더럽게 큰 현실인 골리앗 앞에서는 부질없었다.

이러한 믿음 없음(?)을 극복해 보기 위해서 나는 책상에서 연애와 결혼을 공부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연애와 결혼에 대한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하지만 속 시원하게 위로를 주는 책은 없었다.

이유인즉, 책에서 하는 이야기들은 첫째 기도하라, 둘째 준비하라, 셋째 찾아라, 넷째 찾았으면 믿음으로(?) 나아가라, 다섯째 그러면 결혼하리라… 뭐 이 정도였는데 내 현실은 그럴 엄두를 못 낼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자, 한번 보자.

첫째, 나는 나이가 서른한 살이다.

둘째, 월급 70만 원 받는 파트 전도사인데, 이제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가야 한다. (즉, 월급 사정이 나아지려면 전담(전임) 전도사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한참 멀었다.)

셋째, 우리 집은 가난하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 홀로 나와 동생을 힘겹게 키우셨다. 그러니 모아 놓은 재산이 있을 리가 없다.

넷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는 학자금 대출 빚도 꽤나 있다.

다섯째, 사실은 이게 제일 중요한 이유일지 모르겠다. 나는 외모가 그렇게 탁월하지 않다. 키도 작고, 얼굴도 까만 데다가 크기까지 하다. 

뭐 이러니 아무리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도 결혼은 내게 골리앗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내가 결혼을 한다는 것은 '감히?'라는 생각까지 들어서 혹시 내게 독신의 은사가 있지는 않을까 했는데 텔레비전에서 잠시 스쳐 가는 걸그룹들을 보면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이 생기는 나를 보며 그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자주 깨달았다.  

오호라 나는 찌질한 사람이로다

해가 지나가며 날카로운 봄과 타는 듯한 여름, 잔인한 가을, 솔직한 겨울을 보내며 차오르는 외로움과 허전함과 정욕(?) 속에서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절규한 것처럼 '오호라, 나는 찌질한 사람이로다. 이 솔로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며 절규했다.

물론 당시에도 나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설교를 하곤 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자매들 눈에 은혜로운 전도사였기에 여기서 승부를 걸어야겠거니 하는 생각도 했지만,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은혜로운 것과 연애로운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고통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멀리서 신정론에 대해서 깊이 고민할 게 아니라, 그런 나의 하루하루가 신정론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사례비가 들어오면 통장에는 피라냐 새끼들이 사는지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진 한 자리 숫자만 남고, 매달 더럽게 독촉하는 학자금 대출이자를 볼 때마다 찬양이 나왔다.

빚 되신 주
이자 가운데 비추사
원금 갚게 하소서

이렇게 찌질한 나날을 보내는 중에 '어디선가 누구에게 이상한 일 생기면' 나타나는 짱가처럼 내 눈앞에는 봄처럼 한 자매가 찾아오게 되었으니 그게 지금의 아내다.

아내는 학교 후배의 교회에서 교회학교 간사를 하고 있었다. 근데 신학을 전공하지 않아서 궁금하고 모르는 것이 많았는데 그것을 나에게 물어보라고 해서 후배가 다리를 놔줬다. 그래서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해서 말씀에 관한 것을 나누다가, 이제 육으로(?) 발전하여 점점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고 은혜로움이 연애로움으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 그때 나는 원래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고 사역지를 구하던 차였는데 아내가 자신의 교회에 교회학교 전도사를 구하고 있다고 해서 기도해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 기도 전에 이미 가기로 거의 뜻을 정해 놓고 기도했다. 하나님이 벼락으로 땅에다가 '너 거 기 가 면 죽 는 다'라고 쓰지 않는 한 변동 사항은 절대 없다고 생각했다. 그 교회에서 면접을 보고 예배를 드렸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건강한 교회여서 꼭 사역을 하고 싶었고, 인도하심이 있어서 사역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의 사랑은 사역과 함께 싹이 텄다. 

자연스럽게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참 감사하게도 자매는 나의 첫째부터 다섯째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자매의 부모님이 우리 교회 집사님이셨고, 심지어 어머니는 교회학교 교사이셨는데 나와 만나는 것을 반대하셨다.

당연하다 생각했던 일이다. 못생기고 돈 없는 서른이 훌쩍 넘은 파트타임 전도사와 꽃다운 20대 중반 딸이 교제하는 걸 어느 부모가 좋아하겠는가. 반대하시는 게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덤덤하게 기도만 했다. 그런 자매 부모님께 어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은혜 이펙트였다. 마침 가뭄에 콩 나듯 하는 파전의 설교 기회가 왔다. 철야 예배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생사를 건 설교 준비를 하고 자매는 부모님을 강권해 그 철야 예배에 나오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은혜를 주셨고, 그 은혜 이펙트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로부터 자매의 어머니의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자주 자매와 어머니와 만나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며 편하게 교제했다. 화장실 소변기 물 내려가듯 아주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은혜 이펙트로도 끝나지 않은 게임

게임의 끝이 보였다. 자매와 결혼에 대해 얘기를 했다. 모든 상황과 환경과 관계들이 나와 자매를 결혼하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아서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11월에 자매를 만났는데 1월에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평소 나답지 않은 진격의 정주가 되어서 결혼을 추진하기로 했다. 물론 가진 것은 전혀 없고 대책도 전혀 없었다. 앞에서 말한 첫째에서 다섯째까지도 여전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같이 모든 것이 결혼하라고 내 편을 들어 주는 것 같아서 이때 밀어붙이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집에 가서 어머니한테 앞도 뒤도 없이 결혼을 하겠다고 상견례 자리를 마련했다고 했다. 어이없어하는 엄마를 뒤로하고, 무조건 그 자리에 앉히면 게임 오버라고 생각해서 밀어붙였다. 그게 믿음이라고 생각했고 그 자리에 앉히기만 하면 역사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어머니는 정말 내키지 않아 했지만 오케이를 하셨다.

그해 2월 8일. 상견례 날까지 충분히 기도도 했다. 날씨는 좋지 않았다. 비가 조금씩 내렸다. 하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내가 장가가기로 확정되는 날이다. 야호. 더 이상의 이변은 없을 거고 오늘만 지나가면 드디어 행복해지는구나….

그리고 바로 그날, 정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런 일이 상견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정말 둘이 결혼시키실 거예요?"

대망의 상견례 날이었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짜내서 간신히 예약한 상견례 식당은 차분하고 고요해서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교회에서 늘 뵈었던 자매의 부모님이었지만, 우리 가족과 함께 마주 앉으니 남북정상회담 급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이날이 어떤 날인가? 나는 인터넷으로 온갖 성공적인 상견례에 대한 지식들을 습득한 지 오래다! 나는 유재석의 영(?)이라도 임한 듯 정말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휘어잡는 엠시가 되어 자매 쪽과 우리 쪽을 넘나들면서 분위기 메이커가 되었다. 그 순간에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의 말씀이 그대로 임한 것 같았다.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분위기가 생선 굽듯 무르익을 즈음에 자매 쪽 어머니께서 먼저 얘기를 꺼내셨다.

ㅡ 우리 딸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함께 사랑하며 살면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었으면 해요. (이런 식의 좋은 얘기가 쭉 이어졌다.) 

'나는 이제 다 끝났구나' 하고 긴장을 풀려고 했는데, 어머니의 한마디에 정말 '이제 다 끝났구나'가 아주 다른 의미로 바뀌게 되었다.

ㅡ 근데 정말 둘이 결혼시키실 거예요?

'아니, 이게 무슨 귀신 새벽 기도 와서 방언으로 통성기도하는 소리인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주님의 말씀이 선포된 것도 아닌데 땅과 하늘이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공기가 바뀌었다. 자매의 부모님의 표정이 아이셔 먹었는데 하나도 안 신 척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ㅡ 저희는 모아 놓은 돈도 없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결혼시키시려고요? 얘도 모아 놓은 돈이 아무것도 없어요. 자매님은 있나요?

이게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리고 말로만 듣던 상견례 자리까지 와서 파투가 나는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 오직 2형식의 이 문장만이 이 상황에 아주 적절했다.

'X 됐다.'

내가 주 안에, 주님 내 안에는 어디로 간 거지? 아니, 내 아내는 어디로 지금 간 거지? 어머니는 지금 무슨 짓을 하신 거지? 하나님은 살아 계신 거 맞는 건가? 결국 아무런 수습도 하지 못한 채 정말 설명할 수 없는 어정쩡함 가운데 상견례는 급히 마무리되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아무 말도 없었다. 밖에 나와서 자매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어머니가 몹시 미웠다. 정말 미웠다.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는 계속해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시며 화를 냈다. 동생도 화를 냈다. 주룩주룩 비가 더 많이 내렸다. 어머니와 동생은 택시를 타고 떠났다. 잠시 동안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데 어머니의 행동이 이해도 안 될뿐더러 이 상황이 저주스러웠다. 자매에게 전화를 해 보니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토요일이었기에 교회로 와서 소그룹실에 불을 끄고 누웠다. 누굴 만날까 두려웠다.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생각은 막장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상견례 파투 → 자매와 사이 어려워짐 → 자매 부모님과 사이 어려워짐 → 교회 부서 사역 어려워짐 → 교회 생활 어려워짐 → 사역 제대로 못함 → 결국 사임 → 시궁창 같은 현실에 좌절 → 언제 결혼할지 도대체 모름 → 하나님 원망하고 저주함 → 잠적 → 이름 바꾸고 불교나 무신론자로 컴백 → <안 멈추니까 더 잘 보였던 것들> 혹은 <하나님은 죽었다 시즌2>를 저술함.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지금 당장은 좋아 보여도 너희가 서로를 얼마나 아느냐, 결혼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 하셨다. 지금 우리 집에 돈도 없고, 너도 모아 놓은 게 없는데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듯이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하셨다. 어머니랑 차근차근 상의도 없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이렇게 하는 게 싫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는 동안 마음속에 불 같은 것이 일어나 토해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듯하여 어머니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묵묵히 받아 내며 동의하고, 어머니를 달래 드리며 사과했다. 어머니는 한결 가라앉으셨지만 나는 두결 무거워졌다.

▲ 결혼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 매일 어머니와 대화하기를 시작했다. (사진 제공 김정주)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이 문제였을까? 돈은 어차피 어제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내일도 없을 게 뻔하다. 내 현실에 십 년이 지난들 지금보다 나아지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럼 진짜 이유가 뭘까? 어머니와 나와의 관계가 가장 큰 문제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약 1년 뒤에 기다렸다는 듯이 사춘기가 찾아왔다. 그때부터 틀어지기 시작한 어머니와의 관계는, 내가 회심을 하고 거듭난 후에 제법 순종적인 존재가 되어서 겉으로는 잘 덮여 있는 것 같았지만 그 골은 성경처럼 깊었다. 10년 정도 어머니와 제대로 대화다운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사춘기 때도 어머니는 나를 이해 못 하는 사람으로 낙인찍었고, 회심하고 거듭났지만 여전히 어머니는 나의 신앙을 이해 못 하는 것으로 낙인찍어 놓고 열심히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골들을 메울 생각은 안 하고 불편하고 싫으니까 나는 결혼을 빌미로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프리즌브레이크해서 혼자만 행복해지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어머니가 이런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꽤나 괘씸하고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을 알게 되었고, 그날의 대참사는 바로 오래전 그 지점에서부터 예고되었던 바였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지점에서 이를 악물어야 했다. <고스트 바둑왕>이라는 만화에 나온 대사처럼, 지금 이 바둑판에 바둑을 두는 것은 나고, 지금 이 망가진 판을 뒤집어엎는 것도, 돌을 던지는 것도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다른 누가 해 주지 않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 이었다. 몇 가지 뜻을 세웠다. 첫째, 어머니와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며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섬긴다. 둘째, 당장 조금이라도 좋으니 알바를 시작해서 재정을 모은다. 셋째, 하나님께서 다시 결혼 얘기를 꺼내게 하시지 않으면 다시는 결혼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터닝 포인트였다. 어머니께서 퇴근하고 오시면 삼십 분씩 한 시간씩 대화를 했다. 10년 만이었고, 이건 나에게 순교 수준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결혼을 위해서 한 게 아니라 그냥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

약 5년 동안 틈틈이 일했던, 집에서 5분 거리의 빵집에서 다시금 오전 알바를 시작했다. 하루 6시간, 한 달 빠듯하게 모으면 약 60만 원 정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열 달 정도 모으면 500만 원쯤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른한 살 나이에 대학교 각 입학하는 스물, 스물한 살의 다른 알바생들과 일하는 게 썩 쉽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래도 가만히 넋 놓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자매와의 관계도 좀 서먹한 기운이 있었지만 결혼 얘기를 꺼내지 않으면 큰 문제는 없었다. 자매도 성숙하게 반응했다. 미래가 심히 불확실해졌으나 믿고 따라와 줬다.

*다음 주에 '나 같은 죄인 결혼시킨 주 은혜 놀라워' 2편이 계속됩니다.

이현숙) 

글쓴이는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송파구의 한 교회에서 '파전'(파트타임 전도사)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동년배 직장인으로 치면 비정규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84년생 서른두 살의 김파전. 비록 전도사님이라 불리지만 세상살이는 '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김파전이 자신의 세대인 2030들이 위로받아야 할 교회에서조차 미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조금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신학과 이론으로 내린 정답과 같은 '제자도'가 아니라, 2015년 대한민국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젊은 크리스천들이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삶의 제자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삶의 제자도'란 말은 멋지지만 사실 실제 삶은 김파전의 '파전행전'일 수밖에 없지만요. 

김파전의 이야기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2030세대들이 겪고 있는 리얼한 삶입니다. 어렵고 힘든 미생의 삶이지만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행복을 발견해 가는 이야기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의 제목은 파트타임 전도사(파전)의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행전)라는 뜻으로, '파전행전'이라 지었습니다. 매주 화요일 한 편씩 업데이트됩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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