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말

5월은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이 있는 역사적인 달이다. 5.18에 대한 문제는 정치사회적, 역사적으로 나름대로 재조명되었고 구체적 성과물들이 있지만, 신학적으로는 미미한 실정이다. 

5월을 맞이해서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광주와 역사에 빚진 자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자로서 최소한의 도리이고 신학자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또한 5.18을 통해서 세월호의 아픔과 고통의 의미를 해석하고 위로하며, 함께 고난의 반응에 동참하는 소박한 실천이기도 하다.

신학적 사변이나 사유를 초월한 신학의 상황화는 중요하며, 개인의 고통, 사회문제, 국가적 재난이나 현실에 중요한 지침을 제공해 주어야 할 교회의 신성한 역할이자 의무이고, 사회 변혁에 교회가 감당해야 할 패러다임의 제시이다. 한국 사회의 정교분리의 이분법적 도그마가 지닌 실천적 한계를 어떤 식으로 극복해야 하는지는 중요한 과제이다. 과연 아우슈비츠 집단 학살의 현장, 유대인들 600만이 학살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이른 아침에 아름답게 피었다가 꽃잎처럼 사라져 버린 세월호 사건 때의 고귀한 어린 영혼들, 많은 영혼들, 그중에 크리스천 가족들의 고통과 아픔, 이를 어찌할 것인가?

홍남순 변호사의 탄식과 고백은 지금도 가슴을 친다. 고등군법회의에서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81년 12월 25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홍 변호사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존경받는 정신적 지주였다. 검찰의 취조를 받는 자리에서 조철현(비오) 신부를 만나자 그분은 대뜸 말씀하기를, "조 신부님, 어디가 하나님이 있소!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가 있소?"라고 통분과 항의의 고백을 했다고 전한다. 세월호 사건에서도 이와 비슷한 탄식과 절망, 분노와 통탄의 비명이 들려온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요?" 

1. 5.18민주화운동과 기독교의 역할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1980.5.18.~1980.5.27)에 광주 지역에서 비롯된 민주화운동을 말한다. 광주민주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도 한다.

5.18은 정치적 의미로 보자면 4.19학생운동과 6.3민주화운동, 79년 부마항쟁, 6.10민주화운동 등과 함께 민족사의 한 획을 긋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 평화, 자유, 민주화를 외친 역사적 사건이다. 4.19가 아직도 미완의 혁명이라면 5.18광주민주화운동도 마찬가지이다. 광주의 정신이나 핵심 가치가 점차 실현되는 발전론적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5.18을 '폭동설'로 왜곡, 폄훼하는 하는 사람이나 일부 세력들도 있지만, 5.18민주항쟁을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세계적으로 이미 보장하고 있다. 정통성 없는 정권, 남북 대치 상황에서 정치군인들이 근무지를 무단 이탈하고, 불법과 반역 죄인들인 군인세력들의 무고한 살상과 물리적 폭력 앞에서 '자기방어와 정당한 물리적 대응과 저항을 문제 삼는다면 일제 독립운동, 항일 의병운동, 프랑스 시민대혁명도 폭동이라고 규정해야 하는 논리적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 제정(1995).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 '5·18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1997), 역사 교과서에 정식 명칭 사용, 이상의 과정을 거쳐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그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의의는 5·18광주민중항쟁이 민주화 운동사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되어 '5·18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었다는 데에 있다. 이에 따라 1997년부터 정부 주관 기념행사를 가지게 되었으며, 2011년 5월에는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국내외 검증 절차를 거쳐 '북한군 개입설'이나, '폭동설' 등은 허위라고 결론짓고, 2011년 5월 25일 심사위원 14명의 만장일치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이는 5.18민주화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는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은 근거인 것이다.

80년 5월에는 교수, 종교인들이 전면에 나서 수습에 나서고, 광주의 현장에 동참한 것은 매우 의의가 있는 행동이었다. 물론 오랜 기간 축적된 민주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5.18에 대한 성격 규정은 '12.12-5.18 공판 검찰 논고문' 요지를 보면, 검찰이 "5.18 사건은 12.12 사건으로 군부 실권을 확보한 全斗煥(전두환) 피고인 등이 헌정 질서를 파괴하면서 정권 장악을 기도하고 이에 항거하는 광주민주화운동을 계엄군을 동원해 강경 진압함으로써 다수의 무고한 사상자를 발생케 한 내란 및 반란 사건"(<경향신문> 96.8.6)으로 사법적 정의를 담고 있다.

정치폭력과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살상이나 인간의 죄악을 어떻게 설명할까? 타 민족이나 국가 간의 전쟁이나 전투가 아닌 같은 민족, 국민 간에 벌어진 살육의 사건, 정의의 부재, 인간의 무자비한 폭력과 악인들의 폭정과 선한 사람들의 파멸과 고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이 정당한가. 또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5.18 당시에 광주와 지역 교회들은 시민들의 도피처요, 위로자로, 치유자로 그 역할을 감당했다. 5월 25일 주일에, 목포역 광장에서 기독교인 600여 명이 집회를 개최했다. 12시 30분부터 '목포시기독교연합회 비상 구국 기도회'가 열렸다. 교회들이 교파를 초월해서 하나가 되어 참가한 기도회에서 '광주 시민 혁명에 대한 목포 지역 교회의 신앙고백적 선언문'을 낭독하고 발표했다. '광주-목포 민주항쟁'의 성격을 동학혁명, 3.1운동, 4.19민주구국선언의 법통을 잇는 시민혁명으로 규정한다. 무고한 시민을 죽이는 자들은 적대 세력이고, 신앙적으로 '주의 백성을 탄압하고 살육하는 오늘의 뿔 달린 짐승'으로, 시위에 참여한 민주 시민들에게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이해했다. ('5월 광주항쟁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응 연구', 김흥수)

80년 6월 이후, 광주의 비극에 대해서 많은 교회나 단체들은 희생자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도회와 추모 예배를 갖게 된다. 이러한 교회의 참여와 저항은 한국교회 진보적 성향의 교단이나 교회연합기관(KNCC, 현재의 교회협)으로 확산되어 갔다.

▲ 광주의 아픔은 '십자가'의 현장이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지역 개신교를 포함한 종교계는 시민들의 도피처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그리스도인은 고통과 죄악, 악인들의 득세, 구조 악 가운데에서도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사진 출처 518연구소)

종교계의 동참은 교회와 천주교, 불교계로도 이어진다. 천주교는 김수환 추기경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서 광주 사건을 조명하고, 격렬한 저항과 기도회와 집회를 거쳐서 전국적으로 확산하게 된다. 전두환 정권을 거치면서 요원의 불길처럼 민주화운동은 전국적으로 청년, 대학생, 시민, 종교계, 범국민적으로 전개되어 갔으며 마침내 6.10민주항쟁을 통해서 노태우의 '6.29항복선언'이 나오게 된다. 수많은 민주 인사들의 희생과 헌신, 분신이나 타살의 숭고한 희생과 대중운동을 거쳐서 마침내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고 민주 세력의 집권을 기대했으나 김대중, 김영삼 두 지도자의 분열로 5.18 살상의 주역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민주 세력이었던 김영삼 대통령, 최초의 민주 정권 교체의 김대중 대통령, 이를 계승한 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게 된다.

5.18 전, 후에 한국 기독교는 수많은 생명이 희생된 긴박한 역사 공간에서 진보적 성향의 그룹들 외에는 대다수가 침묵으로 방관자로서 지켜보았었다. 제사장, 예언자, 선지자의 역할이란 신학 지식이나 설교 시간의 신앙 옵션에 불과했다. 현실에서 아무런 제 역할을 감당치 못했고, 오히려 보수적 성향의 목회자들은 독재자를 찬양하기도 했다.

<동아일보>의 1980년 8월 6일 자 기사에 의하면, 광주민주화운동이 진정 국면 약 2개월 후인, 1980년 8월 6일 오전에 23명의 개신교 지도자는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을 위해 서울 롯데호텔에서 조찬 기도회를 개최했다. 문제는 이들의 시국관이다. 성경의 나단 선지자처럼 다윗을 책망하듯이, 불의에 항거하고 회개를 외치며 예언자적 메시지를 선포해야 할 그들이 오히려 악을 정당화하고, 변호하고, 아부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명분은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 기도회'에서 "이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서 사회 구석구석에서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호수아 장군같이 되라"고 기도를 했다. 전두환은 "주님의 각별하신 은총으로 우리 정부와 국민은 슬기롭게 이 난국을 극복하고"라고 표현한다. 이들이 말한 주님은 성경의 주님이 아닌 그들의 죄악을 방어해 줄 그들이 만든 그들만의 하나님이었다. 그가 말한 주님은 악을 일시적으로 허용했으나 방관하지 않았고 궁극적으로는 심판의 주로 전두환을 심판했다. 이날 기도회는 KBS와 MBC가 생중계하였다.

이들 중에 일부는 이 사건을 회개를 하며, 공개적으로 반성과 사과를 한다고 했지만 대부분은 유야무야로 넘어가고 말았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목회자들은 일제 신앙의 배역 행위인 신사참배와 친일행위를 한 과거가 있다. 시대를 어둡게 만들었다. 신앙 양심의 결핍, 몰역사 의식의 산물이다. 이러한 결과가 교회의 사회적 신뢰와 책임 의식의 실추로 이어졌다. 결국에는 사회적 지성이나 국민들로부터 몰역사적이고 반사회적인 이해할 수 없는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시점부터 이미 한국교회는 침체와 퇴보, 저성장의 늪으로 치달았는지 모른다.

2. 악과 고통에 대한 기독교의 신정론

신적인 정의는 무엇인가? 신정론(神正論 Teodicy)은 '신(theos)'과 '정의(dikee)'를 의미하는 두 헬라어 낱말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이 세계에 있는 수많은 악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이 문제는 하나님에게 능력과 선함을 동시에 귀속시키려 하는 모든 형태의 유신론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신이 선하다면 왜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을 말한다. 신은 악이나 화를 좋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신은 바르고 의로운 것이라는 이론이다. 이 세상에 악이나 화가 존재한다는 이유를 들어 신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이론에 대응하여 생긴 것이다. 기독교는 신정론의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을 제시한다. 불행은 믿음을 시험하는 도구이자 타락한 자의 생각을 되돌리는 수단이다. 이러한 신정론은 인간의 고통과 악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어거스틴은 악의 문제를 존재론적(ontological)이며 선의 결핍이라 본다.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떤 현실재의 악한 측면일 뿐이다. 도덕적 접근은,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오용이며 그 결과이다. 재앙, 지진, 병 등 소위 자연악(natural evil)은 인간의 타락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징계로써 이는 자유의지의 오용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한다. 전 세계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지혜에 의하여 조화(공간적)인 것처럼, 인간 역사의 사건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조화(시간적)를 이루어 나간다. 그리고 최고의 완성을 향해 간다. 종말론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정통 신학계에서는 어거스틴의 주장에 많이 동조하는 편이다.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은 '영혼 발달 과정'(Soul-making)이라 한다. 악과 고난이 영적 성장에 필수적일 수 있다는 관점이다. 우리는 현재에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의 흐름 가운데 모순과 지양의 변증법적 선택의 과정이 필요하다. 해석과 적용은 개인의 관점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신과 악에 관해 서로 대립하는 관점으로 일원론과 이원론이 등장한다. 일원론적 신정론은 우주는 항상 선하므로 악도 결국 선으로 귀결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은 어거스틴이다. 이원론적 해법은 선신과 악신이 서로 대립하고 대결로 이해하는 것이다. 현실은 선신과 악신의 투쟁의 장이기에 때로는 악한 신이 승리하기도 하고 때로는 선한 신이 승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신은 유한성의 범주에 종속되게 되어 신의 개념에 불충분하다. 신은 전능한 신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단적인 면으로 흐르게 된다.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과 재림 예수의 다시 오심에 그 해답이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우리의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린 십자가에 있다. 결코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과 악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이 항쟁으로 구속되고 유죄판결을 받은 핵심 인사들 중에 종교적 성향인 인사는 김성용과 조철현 신부 두 사람이었고 평신도로는 명노근 교수와 홍남순 변호사였다. 5.18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전남대 명노근 교수는 광주항쟁 주역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고등군법회의 최후진술을 기독교 장로로서 신앙을 고백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교회 성도인 그가 투옥과 절망 가운데서 고백한 하나님은 원수를 친히 갚아 주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었다. "10년 형을 선고받고 추운 감방에서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분명하신 음성을 듣고 이 고통을 참을 수가 있었다. 내가 당한 수모와 광주로 받은 상처를 참아 내고 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으며, 따라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기도하고 있다."

성경에 보면 고난이나 질병은 자신의 문제, 타인으로부터 오는 고통, 마귀로부터 오는 고통, 하나님의 시험, 불순종이나 거역, 등 다양하다. 기존의 신학적 신정론에서 충분히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면이나, 만족스럽지 못한 해석이나 적용은 성경의 텍스트가 그 권위를 제시해 준다. 현재의 제한된 하나님나라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악과 고통에 대한 해석은 신정론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해석과 적용, 현실의 악과 고통에 맞서서 승리할 변혁의 문제가 새롭게 대두된다.

5.18은 아직도 완전한 진상 규명과 최초 발포자 처벌 등의 미흡한 면도 있지만 최고 책임자였던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들과 일부 주동자들의 처벌은 악의 징계와 정의의 현존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나름대로 정치적, 사회적 보상과 명예에 대한 위상을 볼 때, 결코 하나님의 공의와 사회적 정의, 신정론과 무관하지 않다는 결과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의 진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광주는 불의를 타파한 "정의로운 도시", 망월동 5·18민족민주열사 묘역(5·18 구 묘역)은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다. 광주는 '빛 고을'로 세계에 그 도시 이미지가 각인되었다. 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 민주화의 상징적인 도시, 민주화의 상징적인 성지가 되었다. 반면에 이에 반감을 가진 세력들의 콤플렉스와 정당성의 허약성이 도시 광장에서 보수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에서 폄훼와 시기로 작용하는 역기능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비운에 숨져 간 분이시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광주의 정신'을 주창했다. 국민으로부터 최고 권력을 위임받고 정치적으로 선택되었다. 개인적으로 그분을 뵌 건 광주에서 대선 후보 경선에서 승리를 거두고 대전에서 대회를 치룰 시점이었다. 대전의 유성호텔에서 아침 일찍 우연히 만나서 인사를 드리고 악수를 나누었다. 내가 한마디 전했다. "노 후보님, '광주의 정신'을 계승하시면 반드시 승리하실 것입니다." 환하게 웃으셨다. 그날 오후에 대전 대회장에서 "광주의 정신을 계승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사자후를 토한, 잊지 못할 스토리와 기억이 있다.

3. 복음주의 관점에서의 정의와 평화

한국의 현대사를 살펴보면, 광주의 비극은 복합적인 요인들이 내재되어 있었음을 깨달을 수가 있다. 흔히 말한 '지역감정'은 그 논리나 단어의 조합이 모순이다. 영남과 호남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구도이다. 서로 비슷하거나 동등한 구도일 때 지역감정이라는 표현이 옳다. 그래서 차별과 왜곡에 대한 시정의 요구나 주장은 그 정당성이 있다. 현상적으로 오죽했으면 어떤 외국의 정치학자는 '내국 식민지 청산론'을 말했겠는가? 그래서 지역감정이란 용어는 적절하지 않다. 적용이 성립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남 패권주의와 이에 대응하고 저항하는 호남의 집단적 대응 의식'이라고 정의해야 타당할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연합과 함께 수평적으로도 십자가 안에서 동, 서, 남, 북의 화합을 위해서 그 역할을 다해야 한다. 성경은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한다. 이 두 계명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사랑이 사람 사랑을 통해서 완성되며, 사람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80년 광주, 광주민중항쟁의 사회구조적 배경을 보자. 사회과학적으로는 흔히 3대 모순이 내재하고 중첩적으로 집약되어 발생한 사건으로 본다. 분단 모순, 계급 모순, 지역 모순을 든다. 동, 서 간의 지역 불균형과 독재 시대와 약소국과 강대국 간의 국제정치의 대결 구도가 가져온 비극적인 결과라고 보는 시각이다. 그리고 인간의 내재된 죄성, 폭력, 악, 권력욕과 인간의 탐욕이 부른 재앙이다. 그래서 모든 국민은 이를 의식하건 안 하건, 깨닫든지 못 깨닫든지 이러한 정치, 사회, 역사적 배경은 존재한 것이다.

개인적인 이상이 있었다. 대학교 독서실의 벽에 붙여 놓은 글이 있었다. "내 자신과 기층 민중, 한민족, 제3세계 민중의 인간 해방이 인류의 자유와 평등의 실현이다." 대학 시절부터 품었던 삶의 가치와 지향이었다. 개인적으로 '인간 해방'을 생각할 때도 이러한 인간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 사회악과 사회구조의 문제, 국제정치의 역학 관계에 대한 대안으로 본 것이다. 억압과 소외, 핍박, 현실 세계의 부조리와 사회와 세계의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사회 변혁과 세계 변혁, 민족 통일을 위해서 정치 리더를 꿈꾸었고 활동했지만, 하나님은 어느 순간에 나를 목회자로 부르셨다. 결론은 복음 안에 그 해답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원, 세계 변혁, 자유와 해방의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정의와 평화, 사랑이 하나님나라의 속성이라고 한다. 평화 연구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평화의 개념은 소극적·적극적 평화 개념으로 정의된다. 기독교적 평화 개념은 소극적 평화 개념과 적극적 평화 개념의 양자를 연결시킨다. 평화란 폭력·슬픔·불의의 부재이며 정의·자유의 현존이다. 하나님과 더불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친교 안에서의 삶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여 샬롬(shalom)이라 한다.

"샬롬이라는 말은 '완전하게 하다', '온전하게 하다', '안전하게 하다', '끝마치다' 등의 여러 형태로 쓰인 샬롬으로부터 파생된 말이다. 샬롬(shalom)의 기본적 의미는 '완전성', '총체성', '온전함', '안전함'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샬롬이 가진 뜻은 구약학자의 견해에 의하면 건강, 질서, 온전함, 정의, 조화, 안정, 구원, 복지 등의 다양하고 포괄적인 의미가 담긴 말이다. 그러므로 샬롬은 우리말의 '평화', 독일어의 'Frieden', 영어의 'Peace'와는 단순히 일치시킬 수 없는 말이다. 샬롬의 일차적인 의미는 어떤 유기체나 인간 공동체, 민족, 가족 등이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고 완전하며 안전하게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 희년 신학 연구

구약성서의 평화 사상은 '정의로운 평화(Frieden mit Gerechtigkeit)'이다.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곳에 하나님의 평화가 있다. 정의가 평화를 창조한다. 시편 기자는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을 맞춘다는 시적 형식으로 말함으로써 정의와 평화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말한다. 기독교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평화요(Fax Christ), 평화의 왕으로서 왔다(히 7:2). 신약성서의 평화는 화해와 연관된다. 그리스도는 화해의 사건이다(엡 2:14).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인간의 막힌 담을 헐고 평화를 가져온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롬 5:1).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구원으로 인도해 주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학대받고 영적으로 눌린 자들,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슬픈 자들을 위로하시며 고통받는 자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시기 위함이다(사 61:1~3).

5.18에 대한 신학적 접근을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에서 발표한 "광주항쟁의 성서 신학적 의미"(1985)는 소중한 가치가 있는 해석의 시도였다. "광주항쟁의 객관적인 분석을 뛰어넘는 신앙적 해석을 위한 제안"이 담긴 이 선언문은 1980년 5월 18일의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그것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군사작전을 "환란의 날이며 질책과 치욕의 날"(열왕기하 19:3)로 규정한다. "광주의 죽음은 우리에게 또 다른 희망의 원초가 됨을 알 수 있다. 이 죽음을 통하여 우리 민족은 부활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죽음을 선포하는 세력에게 죽음을 선포할 수 있는 부활, 민중의 부활이 광주항쟁의 피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다." 이러한 선언문은 교회의 예언자적, 선지자적 사명의 롤모델이다. 기도문 같은 선언문과 신앙고백이다. 이 해석은 현재에 이루어졌고, 이루어져 가는 미래의 연속성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3). 성경에는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가 있다. 그리고 인간의 죄성과 타락, 죄악으로 왜곡된 세계 구조를 변혁하는 것이 복음이다.

4. 복음주의 관점에서의 자유와 해방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차지철, 김재규, 김계원이 한양대 여대생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을 앉혀 놓고 시바스 리갈을 마셨다. 이 내용은 언론을 통해서 이미 알려졌다. 문제는 이 자리에서 상상을 초월한 무시무시한 대화가 오고갔다는 점이다. 이 시점은 전국적으로 민주화운동과 정권 퇴진의 불길이 확산될 때였다. 이때는 부산과 마산에서도 치열한 국민적 저항과 시위가 대규모로 일어났다.

부마항쟁에 대처하는 해결책을 박정희는 측근들과 교감한다. '박정희가 곧 국가'라는 위험한 신념의 소유자였던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처럼 강경 진압이나 유혈 진압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탱크를 동원해서 시위대를 깔아 버리면 다 조용해질 것"이라는 차지철의 말에 박정희도 동조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민주 시민들의 시위대에 발포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는 점은 무시무시한 발언이다. 그날 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하지 않았다면 5.18 광주와 같은 비극은 부산, 마산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한국 사회에는 '5월 증후군'이 존재한다. 이것은 해마다 5월만 되면 5.18에 대한 생각이나 그림이 떠오르면서 불안하고 답답해지며 때로는 매우 강한 분노나 슬픔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광주 시민과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겪는 5월 증후군(May Syndrome)이다. 5월만 되면 5.18 피해자와 가족, 광주시민들은 물론이고, 이에 정신적으로 교감하고 공감하는 타 지역 사람들과 국민들도 분노, 초조감과 무력감에 시달리고 아파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할 일이다. 성경은 치료하는 광선(治療-光線, healing light)을 언급한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말 4:2).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 삶을 치료하는 광선이다. 말라기 4장 2절에서는 예수님을 "의로운 해",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했다. 그 빛이 오늘까지 그리고 영원히 나와 함께하시면서 나를 비추시고 지키시고 이끄시고 고치시는 것이다. 병든 자의 육체적 고통과 죄인의 영혼을 아울러 치유하는 초월한 능력. 이는 마치 시들어 가는 식물을 소성케 하는 햇빛처럼, 사망의 그늘 아래 있는 인생을 살리시고 새롭게 하시는 종말에 임할 메시야의 능력(생명)을 시사한다.

성경에는 '정사와 권세'의 배후를 인격체로 본다. 인격체의 악한 영을 지칭한다고 말한다. 정사와 권세의 배후에는 지역이나 나라를 조종하고 역사하는 악한 영이 존재한다. 또한 통치자, 권세라는 의미 이 표현들은 영적 존재 중 특정 계급에 속한 영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반드시 악한, 선한 천사 모두를 가리킨다, 또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구조와 사상과 여러 제도들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벧전 5:8).

마귀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죽음을 사용하여서 예수님을 못 박고 승리한 듯 보였으나, 예수님께서는 보란 듯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세상 정사와 권세를 이기신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는 마귀의 정사와 권세에서 마귀의 지배를 받고 살았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귀의 정사와 권세에서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 안에 머물게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정사와 권세에 대해서 이미 승리를 하셨고 이를 선포하셨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5).

거듭나지 않은 자연 상태의 인간에게 사탄은 여전히 "세상의 신"(고후 4:4)으로서 권세를 가지고 있다. 전쟁, 폭력, 살인은 성경의 원칙에 위배된다. 성경의 진리와 성령의 역사만이 악을 다스릴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영원히 우리를 의와 공평으로 다스리실 것이다.

5. 기독교의 정치사회적 가치와 칼빈의 저항권

세상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변혁되어야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영역주권론'에서 교회나 정치 영역, 각 영역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가 나타난다고 한다. 크리스천들 한 개체의 영혼은 한 국가의 시민이면서 교회의 구성원들이다. 불신자들도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사랑을 받을 충분한 이유와 가치가 있다. 이러한 귀한 영혼들의 핍박과 고통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교회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불의한 권력 계층에 대한 불순종과 저항권을 인정한다. 세속 지배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정치를 할 경우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의 신앙고백적 태도를 가지고 이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 것이다. 칼빈은 교회와 국가의 유기적 관계, 즉 국가와 교회의 통치 영역을 구분했다. 루터가 국가 권력을 영광화(榮光化)하는 경향을 띤 데 비해, 칼빈은 권력에 대한 저항권을 인정하고 국가에 대한 교회의 자유를 확보하였다. 악한 정부에 대한 합법적인 저지 수단으로 칼빈이 제시한 소위 '저항권'이라 불리는 것도 사사로운 개인들의 처신보다는 악한 왕들의 횡포를 제어하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함이었다.

성경에는 모순과 부조리한 사회적, 영적, 현실적 차원의 대안이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지금이 바로 주님의 은혜의 해를 전파할 때이다(눅 4:19). 이 희년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

십자가를 지신 후에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은혜의 해가 전파되고 있다. 모든 저주와 죄와 사망, 어두움의 권세로부터, 자원 약탈과 기회 박탈,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누리는 것이 참된 신앙이고 복음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5.18의 가해자와 피해자들, 현재와 다가오는 통일 시대의 남한과 북한의 모든 영혼들, 전쟁의 상처와 압제, 이데올로기, 억압과 미신, 우상으로부터 해방을 시켜 주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결론적으로 5.18은 한국교회에 많은 과제들을 안겨 주었으나 현재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적 문제 노출이 세월호 사건이다. 교회 차원에서 신학적으로 적절한 대안이나 합의, 공통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소수 그룹들의 충돌과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문창극 총리의 일제 식민지 발언과 같은 역사 인식도 한국교회의 현주소이다.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고, 문제를 제시하지만 정작 대안이 없는 것도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칼빈주의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 설정에 대해서 말한다. 하나님의 통치 원리에 국가 질서는 순복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실천한 대표적인 정치 리더가 링컨보다 노예해방을 앞서 행한 영국의 양심, 윌리엄 윌버포스이다.

'정교분리'는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정치와 종교, 제도론적으로는 국가(정부)와 종교 단체(교회)의 분리를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정교분리는 국가의 권력과 질서나 교회의 영적 권세의 분리는 아니다. 권력은 정당해야 한다. 교회도 실정법이나 국가의 통제에 협력해야 한다. 교회의 범죄에 대해서는 국가의 법질서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해서 교회는 선지자적 사명을 다해야 한다. 이는 신학적으로도 정당하다. 다윗 왕에게 나단 선지자의 회개의 메시지 선포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국가와 교회는 성격과 역할이 다르다. 국가는 권력, 교회는 예배와 성례전을 통한 영적 권세를 추구한다. 정치에는 구원이 없다. 그래서 상호 간의 영역을 존중하며 '창조적 긴장 관계'가 이상적인 관계 설정이다. 상호 협력, 보완적이어야 하나 제 역할과 기능을 다할지 못할 때에 교회는 예언자,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예언자 신앙의 기조는 하나님의 뜻이 이 지상의 역사적 현실과 역사적 상황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확신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서 그의 뜻을 성취하는 방법도 역사적인 도구와 수단을 이용하여 이루신다는 것이었다. 재판관이나 방백들, 권세자들도 하나님이 세우셨다. 올바른 정치지도자들을 지도할 성경적 리더십, 경제적 정의를 실현할 성경적 경제관, 성경적 세계관을 통한 사회, 문화, 역사관, 통일 시대의 기독교적 대안 제시 등은 한국교회의 중요한 책무이다.

맺는 말

광주의 아픔은 '십자가'의 현장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 없는 어린양'의 대속의 죽음을 의미한다. 무고한 광주 시민의 죽음도 "우리 모두의 죄악 때문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죽음"(이사야 53:5~1)이었다. 인간의 사건이었지만 교회의 참여와, 예배와 신학이, 신앙고백이, 하나님의 간섭과 임재가, 신앙적 체험이 존재했기에 반응과 해석, 신학의 상황화와 체계화된 신학적 해석의 장이 되었다.

악한 가해자에게는 보응과 징계와 회개의 복음이, 선한 피해자들에게는 위로와 치유, 회복, 해방과 승리의 복음이 적용될 것이다. 5.18은 죽음과 죄의 권세,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예고이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지상적 메시지이다. 이러한 교훈은 우리들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5.18을 통해서 우리들 안에 있는 죄악을 성찰하고 회개해야 한다. 내면의 죄, 개인의 죄, 정치사회적 문제에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지 못한 죄, 민족국가 안에서 동, 서, 남, 북 갈등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화해자로서의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 등을 말한다. 물론 5.18 가해자들도 징계나 정죄가 전부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 안에서 참자유와 용서와 회복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역설적인 진리이다. 

삼위 하나님은 역사적 현장에 해방자, 심판자, 위로자가 되신다. 숨죽여 기도하는 가녀린 소녀와도 함께했고, 5.18 금남로, 충장로, 도청의 거리에서도 함께하셨다. 광주의 공포와 절규, 무고한 시민의 쓰러져 가는 죽음의 현장, 총소리와 비명 소리와 외침 가운데에도 함께하셨다. 숨진 아들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우는 여인과도 함께하셨다.

총기가 지급되고 총격전이 펼쳐진 대도시의 극한 상황에서도 광주 시민들은 청년, 대학생들을 자식처럼 아꼈다. 자발적인 헌혈자들이 줄을 섰다. 시민군에게는 자비로 과자와 빵과 주먹밥을 만들어서 먹였다. 구별과 차별이 없는 사랑과 일치, 나눔과 섬김의 대동 세상이었고 해방 광주였다. 국가 공권력인 경찰과 치안담당자들이 제 역할을 못할 상황이었지만 자체 '치안질서반'을 구성해서 질서를 유지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단 한 건의 강도 사건이나 범죄가 없었다. 이 점은 세계사적으로도 희귀하고도 자랑스럽고도 위대한 시민의식이었다.

이제 5.18을 패배라고 할 자는 없다. 승리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세월도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과정은 고통스럽겠지만 하나님의 경륜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고통과 죄악, 악인들의 득세, 구조 악 가운데에서도 주님의 십자가(고난과 부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십자가가 고통을 이길 능력이고 부활의 증거이고, 악의 패배와 파멸, 절대선의 궁극적인 승리의 진리이고 해답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과 악에 대한 해석과 대안에는 한계가 있다. 개인이나 공동체, 민족을 들어 쓰시기 위해서 특별한 고난과 연단을 주기도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고난을 허용하기도 하신다. 고난의 신비를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때에 홍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날이었고, 애굽의 군대는 심판의 날이었다. '주의 날'은 기쁜 날, 안식일, 부활의 날, 구원과 심판의 날을 말한다. 세월호 사건에도, 현재의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사건 가운데에도 '주님의 심판과 위로의 날'은 반드시 임할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이 모든 사건과 사람들의 배후에는 삼위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있음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황준배 목사 / Th.D., 한세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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