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와 한국기독교목회자윤리위원회는 9월 2일 제27차 열린 마당 '설교 표절, 왜 심각한 문제인가?'를 개최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 만연한 '설교 표절' 실태와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논의했습니다. 정주채·한진환·안진섭 목사가 참여해 발제했습니다. 각각의 발제 전문을 나눕니다. -편집자 주

Sermon의 라틴어 어원 sermo, 혹은 sermonis는 고대 로마의 웅변가들의 웅변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단순히 '연설'(speech)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그 단어에 세례를 주어 전혀 새로운 의미로 옷 입혔다. 성경이 결코 단순한 책일 수 없듯이 설교도 단순한 연설이 아니다. 설교는 예배의 자리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요, 회중을 위해 자신을 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다. 그러므로 신학자 에밀 브룬너는 "진정한 설교와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게 선포되는 곳에는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졸저, <설교의 영광>(생명의 말씀사), 14에서 재인용)라고 외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작금의 한국교회는 설교 표절로 몸살을 앓고 있다. 재정 문제, 목사의 윤리성 문제와 아울러 설교 표절까지 문제가 되어 내홍을 앓고 있는 교회가 한둘이 아니다. 200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기윤실·홍정길 이사장)가 교역자 36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교 준비, 설교문 작성 실태 및 의식조사'에서 타인의 설교를 그대로 사용한 경험이 있다고 대답한 사람이 43%로 조사됐다. 기윤실은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 교회 홈페이지 활성화 같은 현대 문화의 특성상 상황은 갈수록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어떤 목사는 아예 카페를 만들어 수천 편의 설교를 올려놓고 누구든지 가입비를 내고 회원이 되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요즘같이 지적재산권 문제가 첨예하게 되어 있는 시대에 그런 무분별한 설교 장사가 가능한지 개탄스러울 뿐이다. 이에 본고는 무엇이 설교 표절인지를 규정하고 그 해악과 해결책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무엇이 설교 표절인가

글쓰기에서는 남의 것을 인용할 때는 아이디어든 문장이든 출처만 밝히면 된다.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거의 없이 인용으로 점철되는 글이라도 학위를 받는 데는 문제가 있을지 모르나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설교에서는 출처를 밝히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설교 중에 "이것은 어느 주석에서 따왔습니다", "이것은 어느 목사님 설교집에 있는 내용입니다"를 연발한다면 과연 교인들이 은혜 받을 수 있을까? 설교 표절 문제를 다룰 때는 다음과 같이 일반 글쓰기와는 다른 각도로 접근해야 한다.

(1) 의도적인가
설교자가 처음부터 베끼기를 하겠다고 작심하고 시작했는가, 아니면 설교자가 다른 사람의 자료로부터 받은 영향을 무의식중에 표출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도성 여부가 중요하다. 우리 주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건 서적들, 주석들, 강해 서적들이 나돈다. 그 자료들을 접하다 보면 거기에 나오는 아이디어들, 영감들, 힘 있는 문구들이 끊임없이 목사 자신의 사고 속에 축적된다. 그런 자료들이 설교를 통해 흘러나온다면 그런 것을 표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자료들은 이미 깊은 묵상을 통해 목사 자신의 피와 살로 체화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목사의 사고와 영성, 삶과 인격이라는 필터를 거쳐 선포되는 종합 예술과 같은 것이다. 한 사람의 설교자가 강단에 서기까지는 자신의 고뇌 어린 몸부림은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외부적 영향들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 영향들 중에는 어디에서 왔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예화들 중에는 돌고 돌아서 전해지기 때문에 무엇이 오리지널인지 추적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에는 "제가 어떤 책에서 보니까" 라든지, "누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등의 단순한 포괄적 표현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신이 오리지널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만으로 설교자의 윤리적 책임은 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처음부터 베끼기로 작정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대지를 가져오든 내용을 통째로 가져오든 출처를 밝히지도 않고 남의 설교를 사용하는 것은 명백한 도용이다. 일반 글쓰기와는 달리 설교에 있어서는 출처를 밝힌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의 대리인으로 강단에 선 설교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없이 다른 사람의 말만을 들고 선다면 그것은 설교자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처사이기 때문이다.

(2) 반복적인가
또 한 가지 표절의 척도는 그런 행위가 단회적인가 반복적인가, 그 상황 속에서 불가피한 행위였는가 아니면 습관적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매주 서너 차례씩 설교해야 하는 과중한 부담 속에서 때로는 초읽기에 몰려 불가피하게 남의 설교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출처를 밝히기만 한다면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다고 본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설교 가운데서 강한 성령의 감화를 받으며 현재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의 청중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확신이 든다면 그 설교를 사용하는 것도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필자는 자신의 설교를 재탕하는 재탕 설교도 경우에 따라서는 가능하다고 본다. 교회사에 영성이 출중한 목사 가운데서 자신의 설교를 백 번 넘게 재탕한 사람도 있었다. 관건은 남의 설교를 사용하든 자신의 설교를 재탕하든 그 메시지가 하나님이 회중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적실한 말씀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경우의 표절의 가납 여부는 전적으로 설교자의 양심에 맡겨야 한다.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상습적으로 남의 설교를 사용하는 경우이다. 작금에 설교 표절로 인해 내홍을 앓는 교회들도 대부분 목사의 장기간에 걸친 설교 도용 때문이다. 그런 경우는 100% 출처를 밝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목회 윤리적으로나 말씀의 종으로 세움받은 사명의 차원에서나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이다. 표절 행위에는 아편보다 더한 중독성이 있다. 설교자 자신을 위해서나 회중을 위해서나 그런 행위는 근절되어야한다.

(3) 위선적인가
설교 표절 중에 가장 교묘한 것은 남의 설교를 기술적으로 자신의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남의 설교를 이곳저곳에서 끌어와서 편집하거나 짜깁기해서 자신의 것처럼 둔갑시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설교자는 자료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행위에 도덕적 면죄부를 주는 경향까지 있다. 짜깁기를 하더라도 자신의 관점이나 방향이 있어야 하고 또 자신이 일정 부분 노력도 했으므로 그렇게 짜 맞춘 설교를 자신의 창작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깊은 묵상이나 자신의 고유한 창의적인 내용이 없이 남의 것을 편집한 것에 불과한 설교는 기술적인 표절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남의 예화를 편집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남의 예화에 나오는 이름과 일시를 살짝 바꾸어 사용하거나, 남의 체험을 마치 자신의 체험인양 둔갑시켜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며 저질스러운 변조 행위이다. 그런 비양심적인 행위를 동원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위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설교 표절 행위의 해악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설교 표절이 왜 잘못인가

첫째, 표절한 설교는 하나님의 현재적 메시지를 가로막는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 시대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신적 메시지를 전했지만 그 배후에서 말씀하신 진정한 설교자(the only Preacher)는 하나님이셨다. 설교자 하나님은 교회 시대에는 목사를 통해 말씀하기를 원하신다. 주일마다 강단은 회중을 향한 하나님의 생생한 뜻과 음성을 전달하는 계시의 현장인 것이다.

그런데 설교자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은 없이 베끼기만 한 원고를 들고 선다면 그보다 더한 잘못이 있겠는가. 바울 사도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preaching)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했다(고전 2:4). 그 어떤 인간의 지혜로운 말보다도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하나님의 현재적 메시지를 그분의 백성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 설교자의 직무이다. 그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기 위해 설교자는 늘 두렵고 떨림으로 엎드려 묵상하며 말씀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 몸부림이 없이 ready made된 인간의 말만을 들고 서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선생이 받을 더 큰 심판"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약 3:1 참조). 설교 표절은 윤리적 문제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가로막는 참람한 행위이다.

둘째, 설교 표절은 설교자의 영혼을 고사시키는 행위이다. 혹자는 설교를 통해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만 있다면 표절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논문 표절은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부도덕한 행위지만, 설교는 교인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보다 더 신학 지식이나 지성이나 영성이 깊은 분들의 설교를 이용하는 것을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것은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은 어떠해도 좋다는 상황 윤리적인 궤변이다.

계속되는 설교 표절 행위는 결국 설교자의 영을 죽게 만든다. 위로부터 공급받는 말씀이 없이 남의 대문만을 기웃거리는 영적 걸인 같은 사람의 영혼이 어떻게 건강하고 충만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빈핍한 영성으로 어떻게 교인들을 먹이며 교회를 이끌 수 있겠는가? 상습적인 설교 표절은 양떼들의 목자로 세운 설교자의 영을 고사시켜 결국은 목사도 죽고 교인들도 죽게 만드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셋째, 설교 표절 행위는 교회를 병들게 한다. 베낀 설교라도 은혜롭기만 하면 교인들은 영적으로 잘 성장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교회마다 회중의 특징과 그들이 처해 있는 삶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교회에서 은혜로웠던 설교라고 해서 내 교회에서도 반드시 은혜로우리라는 보장은 없다. 성경에 담겨 있는 영원한 진리를 '지금 여기에' 있는 청중에게 적실하게(relevant) 들려지도록 전파하는 것이 설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본문을 연구하는 것 못지않게 청중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한다. 표절 설교는 청중을 완전 무시한 적실성 제로의 설교이므로 그런 설교에서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기대한다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한 편의 설교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영성은 물론 그의 지성과 인품, 가정생활, 인간관계, 사회생활, 취미 생활에 이르기까지 설교자의 전 삶이 영향을 미친다. 한 편의 설교 안에 설교자의 전 인격이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목사는 "지난주 설교를 준비하는데 몇 시간이나 걸렸습니까?" 하는 질문에 "55년이 걸렸습니다"라고 답했는데 그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표절 설교를 통해서는 그런 설교자의 전 인격적인 감화를 기대할 수 없다. 청중은 비양심과 위선의 냄새를 맡을 뿐이다. 따라서 표절 설교는 교인들에게 일시적인 은혜를 끼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균형 잡힌 건강한 성장을 안겨 줄 수는 없다.

현금에 한국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중심에는 신뢰성의 붕괴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말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그 충격파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수밖에 없다. 수년간 들었던 설교가 남의 것을 베낀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교인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 보라. 결국 목회 현장은 황폐화되고 교회는 병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설교 표절이야말로 이 시대의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핵심 전략 중의 하나임을 인식하고 보다 엄중한 경각심을 가져야한다.

개선을 위한 제안들

설교 표절 문제는 목사 개인의 양식에 의존하는 개인 윤리의 성격이 강하므로 외부적인 제도나 환경의 변화로 개선될 수 있는 여지는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안들을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첫째, 설교 작성에 관한 전반적 교육의 강화이다. 댈러스신학교의 M.Div. 과정은 신학의 전 과목들이 좋은 강해 설교자를 양성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필자도 개인적으로 신학의 꽃은 설교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중요성에 비해 한국 신학교들의 설교에 대한 교육은 빈약한 경우가 많다. 비전공자가 대충 가르친다거나 현장과는 동떨어진 지엽적인 이론 교육에 치우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본문 선택에서부터 주석과 아웃라인 작성, 그리고 전개의 전 과정을 스텝별로 세밀하게 가르치는 실제적 교육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런 든든한 기초도 없이 배출된 사역자들이 평생 남의 자료에 휘둘리며 살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둘째, 목사의 과중한 설교 사역에 대해 제고할 필요가 있다. 작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목회자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조사 결과에 의하면 목회자들은 일주일 동안 평균 7.5회 설교하며, 주일 낮 설교 시간은 평균 45.9분, 그리고 설교 준비 시간은 평균 4시간 4분으로 나타났다. 4시간 준비해서 설교해야 한다면 바울 사도라도 좋은 설교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교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의 절대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목사들이 표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과중한 설교 사역을 개선하기 위해 목사 자신과 교회 당국의 공동적인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목사는 대외적인 활동이나 목회 외적인 일에 시간을 뺏기지 않도록 절제해야 한다. 동시에 목사가 교회 행정에 대한 전반적인 관여나 심방, 각종 모임 주도 같은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도록 교회 측에서도 세심한 배려를 할 수 있어야한다. 목사는 오로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성경적 원리이다.

셋째, 목회 성공주의 신드롬을 극복해야 한다. 목사들은 초읽기에 몰린 다급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타인의 설교를 베끼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유명 목사의 탁월한 설교를 도용함으로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려는 불순한 동기가 작용하기도 한다. 출처를 밝히기만 하면 표절의 잘못은 면할 수 있는데도 굳이 출처를 밝히지 않는 것이 그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랴. 좋은 설교를 통해 명예도 얻고 교회 성장도 꾀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열매가 곧 파멸의 열매였듯이 그러한 욕망은 망하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세속적인 성공주의 가치관에 함몰되어 무분별하게 거짓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곧 자신을 망치고 교회를 파괴시키는 지름길이다.

넷째, 설교 사역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목사는 오직 말씀 증거를 위해 부름받은 자이다.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입'으로 부름받은 자이다. 그것은 인간이 땅 위에서 감당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놀랍고 영광스러운 직무이다. 20세기가 낳은 강해 설교자 로이드 존스는 그의 책 <목사와 설교>의 첫 문장을 "설교 사역은 인생이 받을 수 있는 소명 중에서 가장 고상하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소명이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잭 하일즈는 설교가 유한한 존재들에게 영원을 안겨 주는 사역임을 확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이 강단에 가까이 갈 때에는 천사들도 날지 못하게 하고 천국의 호산나 소리도 잠잠케 하며, 어른들을 경청케 하고 아이들은 귀를 기울이게 하고 젊은이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여, 천국이 응답하고 지옥은 떨도록 전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거룩함으로 기다려야 한다. 그럴 때 영원한 모든 것은 떨며 사탄과 그의 사자들은 두려움으로 흠뻑 젖게 될 것이다."(Jack Hyles, <Teaching on Preaching>, 이황로 역, <잭 하일즈의 설교가 보인다>(도서출판 예향), 263-263)

이 영광스러운 사역을 부끄럽고 부정직한 사탄의 유혹에 넘겨주는 것은 진주를 돼지 앞에 던져주는 망령된 일과 다름이 없다. 우리는 다시금 말씀의 종으로 부름 받은 영광스러운 소명을 자각하고 설교 사역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한진환 / 서울서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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