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흘렀다. 흘리고 싶지 않은데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건조하게 유지되던 마음결에 물기가 차올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34일 동안 곡기를 끊은 유민이 아빠 김영오 씨의 앙상한 손마디를 어루만져 줬다. 안면 골격이 안타깝게 드러난 김영오 씨의 얼굴은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상한 얼굴과 "세월호를 잊지 말아 달라, 기도해 달라, 도와 달라" 말하는 그의 부르터서 갈라진 입술을 바라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애처로움 가득한 눈빛이 차가운 브라운관 너머로 가슴 아프게 전달됐다.

자신의 메마른 두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쥔 프란치스코 교황의 손등에 고단한 이마를 갖다 댄 김영호 씨는 세월호 침몰 후 유민이를 떠나보낸 지 122일 만에 몇 초간 찰나의 순간이나마 의지하고 기댈 곳을 찾은 듯 지난 넉 달의 고통스럽고 외로운 시간을 기대고 있었다. 세월호 침몰의 모든 진상이 낱낱이 밝혀질 때까지 함께 울고 함께 분노해 줄 것 같았던 국민들이 하나, 둘 이제 그만 하자는 목소리를 내고 모든 부조리와 의혹들을 뿌리부터 끄집어내야할 정치인들은 그 와중에도 당리당략에 몸 사리며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고 있는 지금 세월호 유족이 느낄 고독과 울분과 억울함은 오롯이 그들만의 것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이젠 좀 흘려야겠다. 눈물이라도 흘리지 않는다면 내 안의 숨죽이고 있던 지킬(Jekyll)이 본능적 분노에 울부짖으며 내면을 찢어 내고 튀어나올 것만 같다. 어째서 대한민국의 국민이 자식을 잃은 원통함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닌 타국 바티칸 시국의 최고 통수권자에게 읍소(泣訴)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122일간 진척 없이 단식과 시위로 점철된 기진맥진의 시간을 지나서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잡아 준 김영오씨의 손은 세월호 유족의 가족을 잃은 슬픔의 눈물이 진상규명에 머뭇거리는 정부 여당을 향한 원망의 눈물로 바뀌기 전에 벌써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이 잡아 줬어야 하는 손 아닌가.

자식 잃은 자들이, 형제를 잃은 자들이 차가운 바다 속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녀와 가족의 죽음을 그들 손으로 밝혀내고자 천릿길을 걸어 내고, 어버이연합과 엄마부대봉사단이 던진 돌을 맞아 내고, 물과 소금만으로 30일을 넘게 연명한다. 그러나 새누리당 안홍준 의원의 막말을 듣고는 그나마 섭취하던 물과 소금마저 끊었다. 이들이 왜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지경에서 고통 받아야 하나. 세월호가 뒤집어진 것, 그래 지난 고도성장의 역사 속에 쌓여 온 추잡한 정치, 사회적 적폐 때문이라 치자. 그런데 이 나라의 권력자들은 왜 지금 이때에 울부짖는 이들의 뺨을 후려갈기는 또 다른 부끄러운 적폐 쌓길 다시 시작하고 있는가.

눈물을 닦고 있다. 마냥 울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디 있나. 거리 곳곳을 누비며 열심히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던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우리가 잡아 줘야 했을 세월호 유족의 손을 적그리스도란 정체성의 의혹을 받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잡아 주고 있다. 그 와중에도 말 같지 않은 위선적 예수 코스프레라고 코웃음 치며 비아냥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 너희가 내 제자인줄을 알게 될 것이라(요 13:35)."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는 이들은 세월호 유족을 향해 듣기에도 낯 뜨거운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어 대고 있다. 적그리스도의 의혹에 휩싸인 자는 자식 잃은 이의 눈을 맞추고 마음을 쓰다듬으며 손을 마주 잡고 있다. 지금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보이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영적 전쟁이라 일컫는 가톨릭에 대한, 교황에 대한 이단 적그리스도 논란의 소모적이고 의미 없는 투쟁을 이젠 이 나라에서 방기된 채 널브러져 눈물조차 메마른 형제자매들을 돌아보는 노력으로 전환해야 할 때가 아닌가.

눈물을 닦아 주고 있다. 내 볼의 눈물만 닦을 순 없다. 예수의 이름으로 감화된 청년들이 나서고 있다. 한신대 신학생들이 삭발 단식 농성을 한다. 그리스도의 청년들이 촛불 예배를 드리며 "유가족들을 사랑합니다", "유가족이 원하는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소리친다. 청도 삼평리의 할머니들과 새벽이슬 청년들이 함께했다. 목사들이 "단식밖에 할 수 없어 미안하다"며 목회자 릴레이 단식에 나선다.

배고픈 오천 명의 백성들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신 예수님의 심리적 실체는 불가능할 것 같은 마술 같은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똥차게 해 내는 멋들어진 구세주의 풍모를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었다. 배곯는 자녀들을 바라보시다 안타까움의 발로(發露)로 허기진 배를 채워 주신 애끓는 자식 사랑일 뿐이었다. 그 자식 사랑에 전이된 구름같이 허다한 예수의 증인들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 자녀들이 누릴 생명의 기쁨을 위해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바대로 모든 죄와 불의를 향해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고자(히 12:1~4) 눈물로 적셔질 손수건을 준비하고 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낙망한 백성들을 외면한 채 프란치스코 교황을 맞이하며 가면의 미소를 짓는 위정자들을 향한 울분의 눈물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천 년 전의 죽어 흘러가 버린 역사적 존재가 아닌 것이 진정 기뻐 흘리는 눈물이다. 여전히 이 시대와 함께 하시는 동시대적 존재로 그 자취를 드러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의 확증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다. 같은 성경 속의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하심을 읽고도 심각한 난독증에 시달리며 엉뚱한 지점에서 엉뚱한 눈물을 쏟으며 거듭된 착오를 저지르는 이들의 틈바구니에서 올바로 읽고 올바로 이해하고 올바로 행동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 행동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음을 감사해 흘리는 눈물이다.

누가 이들의 이웃인가? 강도당한 이를 보고도 그냥 지나간 종교 권위의 상징 제사장도 부유한 레위인도 이 땅엔 널리고 널렸다. 이 시대엔 선한 사마리아인이 흘릴 눈물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올바른 때에 올바른 생각으로 올바른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뜻을 다해 힘을 다해(눅 10:27) 사회적 냉대에 원치 않게 고립된 이들을 위해 눈물 흘릴 때, 정치와 사회의 구조적 불합리로 어쩔 수 없이 밀리고 밀려 세상의 끝자락에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위태로운 마음을 위해 눈물 흘릴 때 비로소 세상은 이때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당신들이 진정 내 이웃이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프란치스코에게 기댄 김영오 씨를 향한 예수님의 눈물이다. 떠난 자식을 가슴에 묻고 정치적 안일함과 사회적 이기심과 싸우다 지친 세월호 유족을 끌어안고 흘리시는 예수님의 눈물이다. 여전히 사는 것이 버거운 이 땅의 주변인들의 꺼질 듯한 한숨에 흘리시는 예수님의 눈물이다. 여전히 지들 인생 건사하기도 바쁜 당신의 자녀들, 당신의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가슴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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