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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께 드리는 질문: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연재] "지극히 보잘것없는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

권대원   기사승인 2014.07.16  19: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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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가지 계명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이야기하자, 자기들만이 옳고, 자기들만이 선택받았고, 자기들만이 거룩하다고 믿으며 사랑해야 할 이웃들을 배타적으로 '걸러 냈던' 율법 교사는 마음이 찔렸다. 그렇다면 그 마음의 찔림을 해소하고 자기를 합리화하여 옳게 보이는 방법은 한 가지였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계명의 '이웃의 범위'를 확 줄여 버리면 된다. 그래서 그 율법 교사는 이렇게 물어본다.

그런데 그 율법 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눅 10:29)

이 질문은 그 유래와 기원이 참으로 오래된 질문이었다. 창세기에도 이런 비슷한 질문이 나온다.

주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창 4:9)

그 율법 교사는 자신의 박학다식한 지식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이웃 사랑' 계명의 '이웃'이 누군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목숨처럼 지켜 온 자신들의 종교적 순결과 거룩함을 더럽히고 혼잡스럽게 할 저런 미개한 이방인들과 이교도들까지 사랑하고 친절을 베풀 책임이 생기도록 이웃의 범위를 넓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웃이 누구인지 뻔뻔하게 되물어 본다.

마치 '내가 내 이웃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되묻듯이….

이때 예수님은 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며 대답해 주신다.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다.

그런데 그 율법 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 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눅 10:29-37)

이야기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칫하면 자신도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대개 강도가 급습한 지역은 2차, 3차 피해를 예상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아무런 조건도, 피해자의 종교도, 성별도, 민족도 따지지 않고 '순수한 인간애'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며 그를 치료하고 보호해 주었다.

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아무 조건 없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

최근 일어난 일에 빗대어 약간 과장해서 비유하면 현재의 개신교인들에게 '강도 만나 피 흘리는 피해자'가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일단 그는 모슬렘이면 안 된다. 또 동성애자여서도 안 되며, '레이디 가가' 같은 몹쓸 음악을 들어서도 안 된다. 술이나 담배를 해서도 안 되며, 지저분한 욕을 해서도 안 된다. 혼전 순결을 지키지 못하는 방탕한 족속들도 안 된다.

   
▲ 세월호 희생자와 가족들은 우리가 가장 먼저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이웃들이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경계를 넘어서는'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기독교인들

나는 내가 외면한 이웃들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편협했고, 내가 얼마나 우리만의 천국 안에서 갇혀 살았으며, 내가 얼마나 자기만의 안위를 쫓으며 살아왔는지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내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외면했던 이웃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때의 내 비겁함을 기억하며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내가 '내 소득과 교육 수준의 범위, 내 주거와 직장 생활의 범위, 내 신앙과 교회 생활의 범위' 안에 안락하게 살고 있을 때는 내가 사는 삶의 '경계'를 넘어서 살고 있는 이웃들의 삶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할 수 있었다. 내가 관심 갖고 지켜보지 않는 한 그들의 아픔과 외로움은 내 눈에 보이지 않았기에, 더욱 더 외면하기 좋았다.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며 우리에게 주신 복음(Good News)은 '모든 계급과 빈부와 경계와 인종과 나라'를 뛰어넘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기독교인들은 '경계를 넘어서는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귀족과 하인, 자유인과 노예들이 경계를 넘어 '복음의 기쁨과 능력' 가운데 하나님나라 잔치를 벌였던 초대교회의 놀라운 관용과 사랑의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비슷한 소득 수준과, 비슷한 지적 능력과, 비슷한 이해관계로 '패거리'처럼 뭉쳐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무상 급식'을 반대하는 것이 애국이요 하나님의 뜻이라는 설교를 하고, 모든 사회적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없애자는 '차별 금지법'을 온 교인을 동원해서 반대하며 '동성애자들 따위'의 인권은 보호받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옹졸하고 배타적인 갈등의 종교가 되어 버렸다.

나는 교회 일에만 관심 갖고, 교인들만 사랑하며,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는 무관심했던 평범하고 보수적인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내가 외면했던 이웃들로 인해 내 신앙은 점차 변해 갔다. '교회 울타리 너머'에 있는 이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앙의 관점이 변한 후에도 내가 관심 갖고 있는 이웃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SNS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이웃의 사연을 퍼 나르며 같이 분개하거나, 광장에 촛불 하나 들기 위해 나가거나, 얼마 안 되는 약소한 돈을 후원하거나, 이렇게 글을 쓰며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거나, 그도 아니면 그저 기도 모임에 참석하는 것밖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이웃의 아픔에 대해, 이 사회의 부조리와 시스템의 모순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그 아픔을 당하는 이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무력감과 절망감은 더욱 컸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 일만 신경 쓰거나, 나와 교인들의 삶만 형통하면 내 주변의 이웃들이 어떻게 되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았던 과거보다는 훨씬 더 행복하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그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고, 그들의 문제에 '관심'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그들의 어깨 위 무거운 짐을 아주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 있다는 생각에 희미한 미소라도 지을 수 있었다. 내 좁은 마음의 천국 안에서만 살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보람과 연대의 감동이 있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웃들

   
▲ <한계레>는 세월호 참사 두 달을 맞아 세월호 참사에 희생된 경기도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얼굴 그림과 부모의 절절한 심경이 담긴 글을 지속적으로 싣고 있다. 얼굴 그림은 시사 만화가 박재동 화백이 그린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이름과 그 사연을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획이다. 위의 그림은 자신은 구조받을 수 있었지만 친구들을 구하러 배 안으로 들어갔다가 희생당한 단원고 2학년 2반 양온유 양. (<한겨레> 기사 갈무리. 관련 기사 :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나 감사하다던 딸, 고맙고 감사했고 진짜 많이 사랑한다')

최근에는 '세월호' 사고로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겪고 있는 유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을 위해 '기억'하는 것과 SNS에서 새로운 소식을 '퍼 나르는' 것과 광장에 '나가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한없이 무력하고 슬프게 느껴지지만, 그 보잘것없는 동참으로나마 이웃의 아픔에 함께하려 한다. 이 사건의 원인과 실체가 명확히 드러날 때까지 관심을 끊지 않을 것이며, 광장에 나갈 것이며, 기도할 것이며, 300여 명이 넘는 피해자들 중 몇 명을 정해서 아주 상세하게 내 친동생처럼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그 가족들을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려 한다.

'이웃 사랑'은 어쩌면 거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저 내 이웃이 고통당할 때 묵묵히 그저 옆에서 같이 울어 주고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내 이웃은 그 아픔을 이겨 낼 힘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칠흑 같은 아픔과 절망의 시간을 기어이 견뎌 내고 희망의 빛을 발견해서 드디어 웃을 수 있을 때 진심으로 같이 웃어 주고 기뻐해 준다면, 그것은 그 어떤 후원과 위로보다 값진 '이웃 사랑'이 될 것이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롬 12:15)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심판의 기준

내 안락한 삶의 경계를 넘어 어디선가 고통당해 슬퍼하는 이웃들을 잊지 않고 그들과 같이 울어 주고, 그들의 편에서 싸워 주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내가 그 아픔을 외면했던 남일당 참사 유족들과 김웅래 아저씨와 내 사랑하는 후배에게 진 빚을 갚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 기독교는 강자의 편에 서고, 번영하는 자의 편에 서느라, 가장 먼저 돌봐야 할 약하고 가련한 이웃들을 잃어버렸다. 그 이웃들을 되찾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말로 훈수 두는 것을 그치고(제발!), 그저 아파하는 이웃과 함께할 수 있는 현장으로 가서 묵묵히 같이 있어 주면 될 것이다. 그가 가장 힘들어 할 때부터 스스로 회복하여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그 곁을 묵묵히 지켜 주고 그들을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면 된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심판에 대한 이야기에서 다른 어떤 기준도 언급하지 않고 오직 하나의 기준만 언급하셨다. 바로 우리 주변에 가장 약하고 소외된 이웃(너희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우리가 어떻게 대했는지를 기준으로 우리를 심판하신다고 말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편협하고 교조적인 신앙으로 자신들이 사랑해야 할 이웃들을 잃어버린 이 땅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되새겨야 할 말씀이 아닐까?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그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마 25:41-46)

권대원 / 모바일 UX/UI 디자이너를 직업으로 삼고 있으나, 보수적인 대학생 선교 단체 10년과 대형 교회 15년 이상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경험이 더 할 이야기가 많은 삐딱한 크리스천

*이 글은 <ㅍㅍㅅㅅ>(ppss.kr)에 게재된 연재 글입니다.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 "오빠, 내 경험은 천국에서밖엔 얘기할 수 없어요"에서 이어집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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