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생각과 가치관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 이웃들을 존중하고 너그러운 사랑과 관용으로 함께 어울리는 교회와 교인들의 모습은 여간해선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에 충성스러운 교인들은 그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교인들하고만 사귀며, 교회 일에만 몰입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어서 교회 울타리 너머에 있는 이웃들의 삶에 관심이 없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내가 외면했던 이웃들에 대한 나의 부끄러운 이야기이다. -필자 주

노숙인 김웅래 아저씨와의 만남

▲ 지하철 역사에 노숙인들이 앉아 있다. (이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음) (사진 제공 ㅍㅍㅅㅅ)

김웅래(가명)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간사 직분을 맡고 있던 몇년 전 어느 날, 평소처럼 새벽 기도에 나온 팀원들과 교회 로비 1층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허름하게 차려 입은 아저씨, 딱 봐도 노숙인 티가 나는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 교회는 서울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노숙인 아저씨들이 새벽 예배 마치고 공짜로 주는 아침밥을 먹으러 자주 오신다. 그런데 직접 이렇게 말을 거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가까이 다가오셔서 뭔가를 부탁하려는 것 같았다. 난 순간 돈이나 좀 쥐어 보내야지 하는 생각에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 하는데 아저씨가 이렇게 말했다.

"저기요… 저, 외로워 죽겠어요."

순간, 난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가만있을 수밖에 없었고, 뭐라 말해야 할지를 몰랐다. 일단 겁을 먹은 것 같은 팀원들을 먼저 보내고 그 아저씨에게 따뜻한 커피를 사 주며 물었다.

"저…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저기요… 저, 외로워 죽겠어요… 전 고아인데요… 직장도 잘리고 결혼도 못 하고… 노숙하고 있는데 이렇게 죽어 버릴 것만 같아요…."

그러고서는 갑자기 날 와락 안았다.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아저씨가 내 품에 안겨서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데, 매몰차게 밀어내기도 애매했다. 몇 분쯤 그렇게 안겨서 우는 걸 보니 출근 시간이 다가왔지만 이 아저씨를 외면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짧은 순간에 수많은 경우의 수가 생각났지만 결국 결심을 하고 그 아저씨에게 지금은 출근을 해야 하니 이번 주 중에 아무 때나 저한테 연락을 주시라고 내 명함을 건네 드렸다.

명함을 건네면서도 이게 과연 잘하는 행동일까 주저했지만 당시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명함을 건네면서 그 아저씨 이름이 '김웅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교도소로 이어진 인연

그리고는 며칠 후 정말로 교회 1층에서 다른 청년의 전화를 빌려서 그 아저씨는 나에게 전화를 걸었고 아저씨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매일 새벽마다 아저씨를 만나서 식사를 같이 하며 이야기를 들어 드렸고,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없는지 알아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새벽마다 보이던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연락처도 없고 항상 만나던 장소에도 보이지 않아서 그 아저씨가 뭔가 사정이 있어 떠났다고 생각했다. 서운하고 걱정스런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홀가분한 안도감도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낯선 전화번호로 내게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아 보니 김웅래 아저씨였다.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왜 며칠간 보이지 않으셨냐고 물어보았다.

"지금… 영등포 교도소에 있어요…."

"네? 왜요?"

사정을 들어 보니, 전에 직장이었던 식당에서 다른 직원들 급여인 200만 원 정도를 자기가 횡령한 게 있었는데 그 식당 주인이 이 아저씨를 신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히 서울역 앞에서 불심검문에 걸려 그날로 영등포 교도소로 이감이 되었다고 한다.

'이 아저씨를 알게 된 뒤부터 내 인생이 파란만장해지는 건가? 이 아저씨의 삶이 파란만장한 건가?'

이런 생각에 참 번거롭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우연치곤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당시 내가 있던 사무실이 바로 영등포 교도소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아저씨를 보러 면회를 가게 되었고 이 아저씨가 수감되어 있던 몇 개월 동안 간식비로 얼마간의 돈과 읽을 책을 정기적으로 넣어 드리고 계속 면회를 다니게 되었다.

살면서 가게 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교도소 면회를 생면부지의 아저씨 때문에 자주 가게 될 줄이야…. 몇 개월간의 수감 기간을 마치고 이 아저씨가 교도소에서 나오게 된 후 난 어쩔 수 없이 '가족 같은 책임감'을 느끼는 아저씨의 보호자 겸 친구가 되었다.

영원한 헤어짐, 그리고 후회

일단, 교회 팀원들에게 이 아저씨에 대한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한 후 주일에는 교회에서 같이 예배드리고 팀 모임도 나오게 되었다.

겨울에 실제 노숙인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인원밖에는 수용이 안 되는 서울역 근처 '노숙인 쉼터'에서 자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라 십시일반 돈을 모아 생활비를 드려서 겨울이 지날 때까지 '고시원'에서 지내시게 했다. 그리고 직장을 구하고 연락할 때 없어서는 안 될 '휴대폰'도 하나 장만해 드렸다. 팀원들이 뜻을 모아 '옷을 선물하는 친구도 있었고', '책이나 생활필수품'을 선물하는 친구들도 있어서 김웅래 아저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확연하게 '노숙인' 분위기를 벗어 갔으며 얼굴 표정도 너무 밝아지셨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운 직장도 알아보고 활기차게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사는 것 같았던 아저씨가 어느 날부터 그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화 연락도 잘 안 받고 어느 날은 새벽 늦게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술에 잔뜩 취한 상태였다. 그리곤 자꾸 돈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었다. 어디에 쓰실 거냐고 물어봐도 제대로 답해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겨울이 다 가고 4월에 접어들던 어느 날 아저씨는 팀원들이 돈을 모아 드린 고시원비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일단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아저씨에게 꽤 사납게 추궁을 했더니 동료 노숙인들과 술 먹고 흥청망청 써 버린 것을 고백했다. '아, 이래서 함부로 이런 분들을 도우면 안 되는 것인가?'라는 깊은 회의와 배신감에 그날 밤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 아저씨는에 대한 상심은 물론, 나를 믿고 지금까지 후원해 준 팀원들에 대한 미안함이 너무 컸다.

결국 그 아저씨와 만난 지 거의 1년이 다되어 가던 날 또 돈을 빌려 달라고 전화한 아저씨에게 이제부턴 전화도 하지 마시고 연락을 하지 말라고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지금까지의 호의가 배신당했다는 배신감과 분노에 그렇게 소리치고 끊었지만 그때만 해도 시간이 좀 지난 후 다시 연락이 닿거나 교회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걸로 마지막이었다. 그 후 한 번도 김웅래 아저씨를 교회에서 볼 수 없었고 다시 연락했을 때 전화번호는 이미 말소된 상태였다.

1년을 기다려 주고 함께했던 기간과 신뢰가 있었는데…. 나는 고작 몇 십만 원의 돈을 써 버렸다고 그렇게 갈 데 없는 아저씨를 벼랑 끝으로 밀어 버렸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아저씨에게 마지막으로 매몰차게 소리쳤던 그 기억 때문에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그 때를 기억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고작 돈 몇 푼 때문에 배신감을 느껴 그 외로운 영혼을 저버리다니….

권대원 / 모바일 UX/UI 디자이너를 직업으로 삼고 있으나, 보수적인 대학생 선교 단체 10년과 대형 교회 15년 이상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경험이 더 할 이야기가 많은 삐딱한 크리스천

이 글은 <ㅍㅍㅅㅅ>(ppss.kr)에 게재된 연재 글입니다.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지인이 교회 내에서 성추행을 당한 이야기를 다룰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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