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창극 씨의 총리 지명으로 시작된 한차례 회오리가 결국 자진 사퇴로 끝났다. 사람들은 이 일련의 드라마를 주인공의 이름에 빗대어 '참극'이라 표현했다. 당사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조롱 섞인 이 해학의 '이름 붙이기'에는 총리 지명 과정에 대한 나름 지혜로운 민중의 직관이 들어 있다. 애초 국민의 뜻에 부합하는 후보자를 지명하지 못한 청와대의 복불복(福不福)이라는 뜻일 게다.

용퇴한 인사들 나름의 억울함과는 별개의 지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그들에게 전혀 책임이 돌아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공직(公職)이란 죽음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일부러 쫓아가며 죽음을 얻으려 하는 것이나, 죽음이 닥쳐왔는데도 굳이 도망쳐 피하려고만 하는 것 모두가 어리석음의 일반이듯, 이 죽음이 과연 어떤 죽음일지를 헤아려야 하는 것은 그들 몫이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앞으로 그들의 길을 가려는 사람들에게 교훈이 안 되었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여하튼 지명되자마자 반대 여론이 들끓어 청문회장까지는 가 보지도 못하고 연거푸 두 명의 후보자가 낙마하고 말았으니 참극은 참극이다. 이에 대하여 '여론 때문이다', '여론이라고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왜곡된 소문에 근거한 여론은 사단적이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왜곡된 소문'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차치하고라도 총리 임명이 무위로 끝나 버린 것이 여론의 탓이라는 말은 다시 한 번 '미개한 국민'이라는 누군가의 지조 높은 질타를 떠올리게 한다.

묻고 싶다. 언제 청와대가 여론의 함성 앞에 굴복했던 적이 있었던가? 언제 권력이 여론이 송구스러워 겸손으로 자기 의지를 숙였던 적이 있었던가? 국가기관 대선 개입 논란으로 시작해서 세월호의 미칠 것 같은 상황까지 급기야 국민들이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어도 권력은 모르쇠 요지부동이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 쇠 투구, 철 항아리의 자세가 두 차례나 자진사퇴로 끝나게 될 총리 지명을 강행했던 것이 아닌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지난번도 그랬고 이번 사퇴도 청와대가 잘못 지명했노라 인정한 게 아니다. 대통령에게 짐이 될 수 없다며 후보자 스스로 자진사퇴했다. 아무리 억울하다고는 해도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한 모양새이니 이로써 청와대는 여전히 여론에 굴복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2.

문창극 씨의 후보 사퇴로 참극의 국면을 맞게 된 것은 청와대뿐이 아니다. 엉뚱하게 교회가 참극의 와중 내우외환의 상처를 입었다. 하필이면 최후로 기독교계 내로라하는 원로들, 존경받는다는 목회자들을 망라한 문창극 지지 성명이 나간 그날 그가 사퇴해 버렸다. 잠깐이나마 시세의 반전이 엿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 교회는 중립적이었다. 워낙 여론의 반대와 반대의 이유가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건드려서는 안 될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처럼 걷잡을 수 없는 분노였다. 일부 그를 위해 변호와 지지를 표명한 인사들은 대개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관심을 표명하곤 하던 극우적 교계 인사들에 한정됐었다. 반면, 강연에 대한 비판과 비난, 지명 반대 주장은 교회 안에서도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기조는 새삼 이러한 문제가 발견되었다는 놀라움은 아니었다. 오래된 교회 안 현실에 대한 고발과 성찰의 제안이 담겨 있었다. 그때 만일 문창극 씨가 물러났다면 교회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로 지나갔을 것이고, 교회 안 오래된 현실도 매양 그러한 현실로 다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반전에 대한 기대였는지,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린 국면에 대한 반발과 지지의 결집이었는지, 혹은 진정 문제로 떠오른 교회 안 그 오래된 현실―정치적 역사적 입장―에 대한 위협 때문이었는지, 문창극 씨의 외로운 투쟁을 새삼 교회가 적극 변호하고 나서면서부터 실제적인 문 씨의 사퇴 국면과는 별개 양상이 교계 안에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것은 흡사 '우리가 남이가' 하는 말처럼 이번 일에서 우리가 물러나면 안 되리라는 후일의 위협에 대한 연대의 의지 같은 것으로 사료된다. 주지한 교계 지도자들의 명망 있는 이름들과 더불어 발표된 문 후보자지지 성명이 그 결과다. 제목은 이렇다. "문창극 후보의 역사관은 식민 사관이 아니라 신앙적 민족 사관이다" 아쉽다. 조금만 문 씨가 빨리 사퇴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잘됐다. 드러날 것이 드러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 문창극 씨의 강연으로 촉발된 비난 여론을 교회는 정치적으로 편향 왜곡된 여론 몰이로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분명 교회 내에서조차 비판과 비난이 들끓었음을 간과하고 있음이다. 향후 치열한 분열이 예상될 대목이다. '이조 정랑' 자리 하나를 두고 동서 분당이 표면화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좌우로 갈라진 한국교회, 한 지붕 쓸 수 없을까" 제하의 '문창극 사건으로 드러난 보수·진보 대립…한목협, 중도들의 공론의 장 마련 시급'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둘째는 (전체라고 할 수 없는 일부 지도자들이지만) 교계는 문창극 사태에 직면해서 반성이나 성찰의 뜻이 전혀 없음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굳이 전문적인 학술상의 논쟁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문제가 된 역사관에 대해서라면 이미 헌법이나 역사책이나 국가 기념일이나 학계의 명시 혹은 일반적인 평가 어떤 면을 보더라도 그게 바로 식민 사관이라는 데 이견이 없는데 교회는 그것을 신앙적 민족 사관이라고 비호하고 있음이다. 이 역시 소모적 논쟁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더불어 그동안 중립적으로 처신해 온 교계의 지도자들마저 자신들의 이름을 내걸고 의사 표명에 나섰다는 것은 피치 못할 사실로 두고두고 거론될 것이다.

3.

한 가지 사실만을 지적해 두고 싶다. 교계에서 신앙적 민족 사관이라고 부른 그것을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학계에서는 일찍부터 식민 사관이라고 불러 왔다는 그 사실 말이다. 최근 십 몇 년간 뉴라이트 계열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든가 하는 희석된 주장을 펼치기도 했지만 공적인 학문의 영역에서는 누가 뭐라지 않더라도 스스로 할 소리에 제한을 받는 바가 있어 교묘하게는 할망정 대놓고 적극적 식민 사관을 주장하진 못했다. 가령 박근혜 대통령은 그토록 대통합과 화합을 이야기하면서도 무슨 이유에선지 국가 기념일로 지정된 5.18 기념식이나 제주 4.3항쟁 기념식에 참가하지 않고 있다. 심증으로는 그녀가 그러한 현대사의 비극들을 어느 정도로 여기고 있는지 알 만하다. 그러나 그런 그녀라도 대놓고 5.18이나 4.3을 폄훼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현 집권 세력의 극우적 인사들도 마찬가지다. 이미 그것은 역사적 의미 규정이 완료된 것으로 거기까지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 후보자의 발언은 바로 공적인 자리에서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들을 시원하게 내뱉었다는 데서 문제가 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 정도 말은 술자리나 사사로운 모임에서 자신과 정치적 뜻이 맞는 사람 끼리나 거리낌 없이 나눌 수 있는 주장이지 공적인 자리, 특히나 국가의 총리 후보자가 할 소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문 후보자 자신이 변명으로 내세운 윤치호와 이광수가 과연 변명의 몫을 담당해 줄 인사들이라도 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 민족의 상류 지식인을 자처하며 친일 매국 행위의 대가로 일제로부터 호의호식 대접받고 우리 민족은 게으르고 자립심이 없어 남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느니, 스스로 자립할 상무 정신이 없으니 내선일체하여 민족을 개조해야 한다느니, 사방을 돌아다니며 적국(敵國)의 식민 지배를 위한 매국적 언사를 일삼던 그들의 말이 과연 독립을 쟁취한 지 70년이나 지난 아직까지 인용될 가치가 있단 말인가.

왜 같은 시기 게으르지 않고 자립심 넘치게 일제와 싸우던 무수한 선조들, 같은 시기 의혈 무장 투쟁으로 상무 정신 드높게 싸워 나갔던 독립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것은 문창극 씨가 윤치호와 이광수의 정신으로 그 자신의 게으름과 자립심 없음, 그 자신의 상무 정신 없음을 이어받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게으르고 자립심이 없으니 결국 힘센 편에 붙어야 하고 상무 정신이 없으니 전투적으로 싸우지는 못하고 외려 적의 편에 붙어서 그 혜택을 누리며 고작 그 자신의 한계인 먹물 지식인의 고질병을 민족 전체의 병인 양 침소봉대하며 그것으로써 지식인 선각자 노릇을 하는, 그 윤치호와 이광수의 병이 곧 자신의 병은 아닌가.

거기에 기독교 신앙을 끼어 맞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것이 식민 사관이 아니라 신앙적 민족 사관이라면 도대체 이 신앙은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누구의 신앙이란 말인가.

문 후보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광수·윤치호의 하나님 뜻이라니, 그것은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안창호·안중근의 하나님 뜻은 아닐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존경은 할지언정 그가 그들의 길을 따라 갈 사람은 결코 아닌 것이다. 이광수·윤치호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은 당대 기득권의 하나님 뜻쯤 될 것이니 역시 당대 고난당하는 자들의 입장에 선 하나님 뜻은 아니다. 당대의 고난당하는 자, 투쟁하는 자의 입장에 서 있지 않았던 자들의 신앙을 이어받았으니 역시 이 시대에도 그런 것이다.

사실 문제가 된 것은 동영상 하나뿐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식민 사관이라 부르든 민족적 신앙 사관이라 부르든 그 행동 방식이나 삶의 태도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그는 하나님의 뜻을 통상적이고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의 반대편에서 찾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교계의 전체적 입장으로 표명될 수 있었을까? 여기에 그간 내로라하는 교계의 명망가들이 대거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교회의 현실인 것이다. 바라기는 문 후보자가 용퇴한 이것 역시 하나님의 뜻일 터이니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진정한 신앙적 민족 사관이 어떤 것일지 헤아려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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