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의 '몰살하는 하나님에 대한 의구심', '대량 살육도 주저 없는 성경의 기적, 믿으면 끝?'에 이은 연재 마지막 글입니다. 이 글은 곽건용 목사의 페이스북에 실린 것으로,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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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에 와서 구약 공부하면서 언제부턴가 '거짓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바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는 얘기들을 주제로 논문을 쓰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던 거다. 거룩한 성경에 무슨 거짓말하는 얘기가 나오냐고 묻는 사람은 성경을 별로 읽지 않은 사람이리라. 구약성서에는 거짓말하고 속이는 얘기가 제법 많이 나온다. 하긴 사람 사는 세상에 거짓말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구약성서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얘기이므로 거짓말하는 얘기가 있는 게 그리 이상하진 않다. 구약성서 얘기들이 그렇게 맑고 투명하지만은 않다는 거다.

거짓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야곱과 그의 외삼촌 라반일 게다. 둘은 서로 속이기를 경쟁하다시피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밖에도 거짓말한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그 중 내 관심을 끄는 것은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얘기였다. 그러면 "뭐? 하나님이 거짓말을 했다고? 이런 불경한…"이라며 핏대부터 세울 사람이 있겠지만 그런 경우가 있는 걸 어쩌겠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얘기는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북 왕국 이스라엘 왕 아합과 남 왕국 유다의 예언자 미가야 얘기다.

아합은 야훼의 맘에 무척이나 안 드는 왕이었던 모양이다. 야훼는 그를 죽이려고 천상회의를 소집해서 "누가 아합을 꾀어 라못 길르앗으로 올라가서 죽게 할꼬?"라며 회의 참석자들의 의견을 물었다. 왜 그냥 죽이지 않고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그랬다는 거다. 이때 한 '영'이 썩 나서서 "내가 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모든 예언자들의 입에 들어가겠습니다"라고 제안했다. 그러니까 예언자들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게 만들겠다는 거였다. 이 제안을 한 '영'의 정체가 궁금하지만 본문은 그 이상은 얘기하지 않는다. 좌우간 야훼는 이 '영'의 제안에 대해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대로 해라" 하고 허락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야훼는 이 '영'더러 거짓말하라고 허락해 줬다는 얘기다. 야훼가 직접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거짓말하겠다는 '영'의 제안을 허락해 줬으니 적어도 간접적으론 거짓말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내가 믿어 왔던 야훼의 모습이 아니다. 나는 야훼가 '신실하여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고 믿어 왔다. 야훼와 거짓말은 어울릴 수도 없고 어울려서도 안 되는 조합이었던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나처럼 믿어 왔고 지금도 그리 믿고 있을 터이다. 그런데 열왕기상 22장은 분명히 야훼가 한 ‘영’더러 거짓말하라고 허락했다고 말하니 이걸 대체 어째야 하나 말이다.

열왕기 본문에 따르면 이 얘긴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미가야가 환상 속에서 본 얘기다. 그가 정말 이런 환상을 봤는지 안 봤는지는 본인만 알 터이고 본인 이외에 누구도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구약성서는 미가야를 참예언자로 판단했으니 그의 말을 믿어야 하지 않겠나. 흥미로운 점은 왕 편에 섰던 예언자 시드기야가 환상을 얘기한 미가야의 뺨을 때리며 "야훼의 영이 방금까지 내게 있었는데 언제 네게 가서 그런 말씀을 했단 말이냐?"며 길길이 뛰었다는 대목이다. 방금까지 자기와 같이 있던 야훼의 '영'이 언제 미가야에게 가서 그런 말을 했냐는 거다.

상황이 매우 긴박했으므로 농담하는 게 아닐 텐데 왜 얘기가 아이들이 “내가 너보다 더 힘이 세거든!”이라며 다투는 것처럼 들리는지 모르겠다. 나만 그런가? 여러분은 어떤가? 이 얘기가 당황스럽지 않은가? 이 텍스트를 처음으로 꼼꼼히 읽었을 때 나는 무척 당황했다. 이 얘기의 하나님은 그동안 내가 믿어 온 하나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용납하는 하나님, 내겐 무척 낯선 하나님이었다. 이 얘기는 욥의 재산과 열 명의 자녀들을 전부 사탄 맘대로 처리하게 허락한 욥기의 하나님만큼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 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거짓말'에 관심 갖게 됐다. 그래서 남들이 하듯이 나도 먼저 비슷한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쓴 사람이 있는지를 검색해 봤다. 그 결과 세 편의 논문을 찾아냈다. 그때가 2000년 아니면 2001년이었으니 지금은 더 많아졌을 수도 있겠다.

첫째는 오라 혼 프라우저(Ora Horn Prouser)가 미국 유대신학교대학원(The Graduate School of the Jewish Theological Seminary of America)에 1991년에 제출한 <성서 설화에서의 거짓말의 현상학>(The Phenomenology of the Lie in Biblical Narrative)이다. 이 논문은 사람이 한 거짓말과 하나님이 한 거짓말 모두를 다루는데 그중 한 장(chapter)이 창세기 3장, 18장, 출애굽기 1장, 열왕기상 22장, 그리고 예언서들에 나오는 하나님의 거짓말을 다루는 데 할애되어 있다. 둘째는 낸시 룻 보웬(Nancy Ruth Bowen)이 1994년에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 제출한 <참예언과 거짓 예언에 있어서 속이는 자로서의 야훼의 역할>(The Role of YHWH as Deceiver in True and False Prophecy)이라는 박사 학위 논문으로서 열왕기상 22장, 예레미야 20장, 그리고 에스겔 4장에 나오는 야훼의 거짓말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찰스 앤서니 갠트(Charles Anthony Gantt)가 1998년에 하버드대학교 신학부(Harvard University, Divinity School)에 제출한 <네 하나님이 너를 속이게 하지 말라 : 히브리 성서에서 하나님의 기만에 대한 생각>(Do Not Let Your God Deceive You : The Idea of Divine Deception in the Hebrew Bible)으로서 이 논문은 사람의 거짓말과 하나님의 거짓말을 모두 다루되 하나님의 거짓말의 경우는 앞에서 말한 보웬의 논문이 다룬 텍스트 이외에 열왕기하 19장과 예레미야 4장도 다루고 있다. 다들 '발칙한' 논문들이었다.

나는 이 논문들과 학술지에 실린 몇 개의 관련 논문들을 읽고 이 주제로 논문 쓰기를 포기했다. 이것들보다 더 참신하고 깊이 있는 논문을 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과정을 겪으면서 구약성서는 하나님도 거짓말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사실과 때론 진실을 말하는 것(telling the truth)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점, 곧 구약성서는 더 높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거짓말도 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물론 이 두 가지 점은 매사에 적용될 수는 없고 매우 신중히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는, 어떤 특정한 경우에 과연 하나님이 거짓말을 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고, 만일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해서 실현하려는 가치가 무엇일까를 신중히 탐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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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얘기를 해 보자. 어떤 자가 사람을 죽이고 나서 "하나님이 내게 이 사람을 죽이라고 했다. 난 그렇게 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었다"라고 주장한다면 우린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터무니없게 들리겠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닌 것이, 살인 명령은 아니지만 주위에서 “하나님이 내게 이러저러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든지 "내가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이러저러하게 하라고 응답해 주셨다"라는 말을 드물지 않게 듣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사회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우선 이 사건의 처리 권한은 교회가 아닌 국가가 갖고 있다. 교회에는 사법권이 없고 살인은 형사사건으로서 국가가 다룬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정말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살인을 했는지에 관심을 가질 수 있지만 사건을 처리하는 국가기관은 거기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다만 그렇게 말하는 용의자가 정신적으로 건강한지 여부를 확인하려 들 게다. 확인 결과 그가 미쳤다면 정상인이 받았을 처벌과는 다른 처벌을 받을 터이다. 이 얘길 더 길게 할 필요는 없겠고 좌우간 모든 결정은 법정에서 내려지게 되어 있다. 교회가 주관하는 종교재판이 아닌 세상 법정에서 범법 여부와 처벌이 정해진다는 말이다. 이것이 현대사회에서 살인자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용의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살인했다고 주장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살인의 동기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주장은 설령 그가 진짜 그런 명령을 받았다고 해도 재판에서는 고려되지 않는다. 현대사회가 신정정치(Theocracy) 사회가 아니라 정교분리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다. 곧 현대사회는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살인을 명령한다고 믿지 않는 사회라는 말이다.

하지만 구약성서에서는 그렇지 않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사람들을 죽인 얘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중에서 비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일부 기독교인들까지 당혹스럽게 만드는 얘기가 바로 야훼의 명령을 받아 대량 학살을 저지른 얘기들이다.

시편 58편 시인은 10~11절에서 "의로운 사람이 악인이 당하는 보복을 목격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악인의 피로 그 발을 씻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사람들이 '과연 의인이 열매를 맺는구나! 과연 이 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구나!' 하고 말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노래했다. 어떤가? 섬뜩하지 않은가? 악인이 당하는 고통을, 그것도 보복의 고통을 당하는 걸 의인이 보고 기뻐하게 해 달라고, 의인이 악인의 피로 발을 씻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 이 시편에 여러분은 얼마만큼 감정이입이 되는가?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음이 구약성서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이집트인들에게 내려진 재앙, 특히 이집트 모든 장자들이 떼죽음당한 일(출애굽기 11장), 여리고 성과 아이 성에서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몰살하라는 여호수아의 명령(여호수아 6장과 8장), 예언자 엘리사의 이름으로 예후가 저지른 잔인한 행동(열왕기하 10장), 그리고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다고 모세가 레위 사람들을 시켜 저지른 잔인한 살인(출애굽기 32장)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것들이 예외적인 경우일까? 어쩌다 일어난 사건일까? 그렇지 않다. 구약성서는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전제한다.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구약성서는 믿고 있다는 얘기다. 구약성서가 야훼의 명령으로 그런 대량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고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곧 대량 학살이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건데 과연 우리는 이런 얘기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말 야훼가 그렇게 명령했을까? 그게 야훼의 뜻이었을까?

이스라엘은 그렇게 받아들였음에 분명하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별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는 '구약성서'도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내가 이스라엘과 구약성서를 의식적으로 구별하고 있음에 주의하시라. 역사적인 존재인 이스라엘이 대량 학살을 야훼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과거와 지금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서가 대량 학살을 야훼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전하는 것은 대단히 큰 신앙적, 신학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야훼의 명령이고 야훼가 친히 한 행동이라면 오늘날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중대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기독교의 ‘경전’으로서 구약성서가 갖고 있는 ‘영향력’ 때문에 이런 얘기는 적당히 넘어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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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로 첫 글을 썼을 때는 온누리교회 장로인 문창극 씨가 총리 후보로 지명되기 전이었는데 그동안 이 양반 덕분에 이른바 '하나님의 뜻'이 한국 사회에 유행하게 됐다.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의 뜻'을 입에 올리게 됐으니 문 씨가 전도에 도움이 됐다고 해야 하나….. 그건 두고 볼 일이고 좌우간 이 양반 덕분에 나는 글쓰기가 조금은 수월해졌다. 이 양반이 반면교사 역할을 제대로 해 줬고 또 이 양반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글을 썼기 때문에 내 생각을 좀 더 가다듬을 수 있었다.

<뉴스앤조이>에 올라온 글들만 봐도 문창극 씨의 말에 찬반이 분분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여기 올라온 글들은 대부분 문 씨 주장에 반대 논조를 담고 있지만 찬성하는 사람들 주장도 보도하고 있어서 그들 주장도 일부는 파악할 수 있었다. 이 글들의 주장을 요약해 보면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신앙과 성서의 기반을 두고 문 씨에 동조하는 사람들 주장을 요약하면 그의 주장이 '성서의 역사관'과 일치한다는 거다. 정한철 기자의 보도에 의하면, 고신대 이상규 교수는 문창극의 "역사 인식은 전통적 기독교 역사관을 잘 보여 주는 것"으로서 "역사의 모든 사건은 한정된 인간의 인식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의 표현이며 이는 서구 기독교의 가장 일반적인 역사 인식이요, 함석헌 선생의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같은 기사에서 전광훈 목사는 한국의 목사 99%가 다 문 씨처럼 설교한다면서 "이스라엘 400년 애굽 종살이와 바빌론 70년 포로생활이 백성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인 것처럼 우리 근대사의 긍정적, 부정적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했단다. 그래서 이들의 주장을 비판하는 천정근 목사도 "문창극 총리 지명자의 발언들은 사실 일반적인 교회 안에서는 그다지 이상하게 들리거나 성도 대중의 공분을 불러일으킬 만한 특이한 견해가 아니라"고 요약한다. 오래 전에 유럽에서 신약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종윤 목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문 씨의 강연이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매우 수준 높은 신앙인임을 보여 준다"면서 "문 후보의 역사관은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역사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므로 기독교 신학의 차원에서 건강한 신앙인으로 존경받아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견해대로라면 지금 세상과 일부 기독교인들은 '존경받아야 할 기독교 신앙인'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반해서 이상규 교수와 같은 대학의 대학원 교수인 박영돈 교수는 문 씨의 발언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의 발언은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며 그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을 촉구하는 사건"으로서 "이는 전통적으로 교회가 신봉해 온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이 얼마나 피상적으로 이해되는지를 잘 보여 주는 실례"라고 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발생하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악까지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순 귀결에 이르는 것만큼 주권 사상을 왜곡하는 것도 없다"면서 "악과 불의는 결코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신 뜻을 끊임없이 거역하고 방해하며 좌절시키려는 악과 불의의 세력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반역의 세력을 주권적인 섭리로 제압하고 승화하여 궁극적으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신다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문 씨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일제의 악랄한 지배, 한국전쟁과 분단 등을 우리 민족을 연단해서 결국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모독할 위험이 다분한 발언"이라는 거다. 그런 표현은 하나님을 악과 불의에 대한 책임에 묶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박 교수는 문 씨가 고대 이스라엘과 우리 민족을 직접 대비한 것은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서 지금 구약의 이스라엘 국가와 유일하게 대비되는 대상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임을 강조했다.

한편 이만열 교수와 김요한 목사는 문 씨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역사학자인 이 교수는 성서적 관점보다는 역사적 시각에서 문 씨의 주장을 비판한다. 그 역시 문 씨의 생각은 "몇 가지 문제가 되는 부분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크리스천이 생각할 수 있을 법한 내용"이고 "한국교회에서 훈련받은 크리스천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소지가 많다고 생각한다"고 말해서 상당히 '너그러운' 입장을 보여 준다. 이 교수는 문 씨의 역사관에 있어서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나서 문 씨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면 그게 '숙명론'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그는 문 씨가 일어난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하지 말고 "좀 더 여지를 두는 표현을 썼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단정함으로써 "다른 어떤 사고나 기준이 개입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강연 전체를 하나의 '도그마'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과학이나 인간의 물음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졌고, 그 역사를 통해 현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도 주춤해져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문 씨의 문제가 단지 표현의 문제일 따름이라는 인상을 준다.

마지막으로 출판사 대표인 김요한 목사는 '하나님의 뜻'이란 말에 담긴 의미에 집중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문구가 현세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현상에 대해서 평면적으로, 혹은 보편적으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실제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상당수의 일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불순종하거나 역행하거나 대적하는 사단적인 것들임을 고려한다면, 그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불행과 시련, 고난을 사용해서 궁극적으로 유익을 가져다주시는 분이지만 그런 경우에도 하나님은 "고난을 허용하시는 분이시지, 고난을 창조하거나 제공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불행과 고난의 일차적인 제공자는 악 또는 악의 전위대인 악인들"로서 "이 악의 세력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샬롬의 통치를 뒤흔들면서 이 세상을 혼돈과 공포의 세상으로 끌고 들어가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불행의 제공자가 아니다. 그것은 "악의 힘이 저지른 일들"로서 "구체적으로는 동아시아 국가들과 우리 민족의 배후에 있는 정사와 권세들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김 목사는 우리 민족이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고통당하던 우리 민족과 함께하셨다고 주장한다.

성서의 역사관, 기독교의 역사관, 하나님의 주권 사상, 주권적 섭리, 신정론, 숙명론, 선악(또는 하나님과 사탄) 이원론…. 문 씨의 강연 덕분에 이같은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이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수면 위로 떠올라 토론을 끌어냈으니 그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까.

문 씨의 주장에 동조하고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구약성서의 역사관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겪은 이스라엘의 고난과 바빌론 포로 생활은 모두 하나님의 징계 또는 연단이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거다. 반면 문 씨의 주장을 반박하는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서 보는 문제점은 그렇게 보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까지 하나님이 책임져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신정론'(theodicy)이 문제가 되는 거다. 그래서 문 씨의 주장은 '위험한' 발언이고(박영돈) 강연 전체를 '도그마'로 만드는 발언이다(이만열). 왜냐하면 불행은 하나님이 제공한 게 아니라 정사와 권세들의 작품이기 때문이다(김요한).

둘 사이의 차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문 씨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악과 불행까지도 하나님이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문 씨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악과 불행은 하나님이 제공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박영돈 교수는 그것들이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는 반면 김요한 목사는 그것들을 하나님이 '창조'하거나 '제공'하진 않지만 '허용'한다고 말함으로써 신약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선악 이원론의 세계관을 전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 문 씨를 옹호하는 사람들과 비판하는 사람들 간에 공통점은 없을까? 이렇듯 대립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으니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둘 사이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성서, 특히 구약성서의 역사관을 양자 모두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게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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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번 글에서 구약성서의 세계관과 패러다임에 대해 얘기했다. 구약성서는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나름의 세계관과 패러다임을 갖고 있으므로 구약성서가 전하는 사건 및 그걸 기록한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거기 전제되어 있는 세계관과 패러다임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춰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거기서 두 가지 사건을 예로 들었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홍해가 기적적으로 둘로 갈라져서 그들은 무사히 건넜고 뒤따르던 이집트 군대는 수장됐다는 얘기와 여호수아 10장에 나오는 태양이 멈췄다는 얘기가 그것이다.

이들 얘기의 역사적 사실성 여부는 학자들 간에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홍해가 갈라진 얘기는 그래서 히브리인들이 건넌 곳은 홍해(Red Sea)가 아니라 갈대바다(Reed Sea)였다고 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사실 히브리어 원문에도 '갈대 바다'라고 되어 있으니(출애굽기 15:4) 이 주장의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다고 하겠다. 그런데 태양이 멈춘 사건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진지한 토론이 벌어지지 않았다. 내가 과문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역사성을 따지기에는 사건이 너무 엄청나고 현대인에게는 터무니없게 들리기 때문일까?

정작 나의 관심사는 이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 여부가 아니라 이런 사건들이 벌어졌다고 믿고 그것을 기록해서 후대에 남긴 성서 기자들은 어떤 세계관과 패러다임을 갖고 그렇게 이해했고 썼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이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여부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이 사건들을 기록한 성서 텍스트를 '이해'하고 싶은 거다. 그러려면 기록자들이 어떤 세계관과 패러다임 안에서 사건들을 이해하고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대로 기록했는지를 알아야겠다는 거다.

나는 고대인이 현대인에 비해서 극히 제한된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지극히 당연한 얘기를 했다. 물론 고대인들에게는 과학적 지식이 전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 역시 '나름의' 과학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도 주의 깊게 사물과 사건을 관찰했고 실험도 했다. 이스라엘은 양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에 끼어 있었다. 양 문명의 영향을 직, 간접적으로 받았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나는 고대인들의 과학 지식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또한 고대 이스라엘의 과학 지식 수준과 하나님의 그것을 동일시하려는 의도 또한 전혀 없다. 하나님이 고대 이스라엘의 과학적 지식에 갇혀 있는 분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유치원생에게 미적분을 가르칠 수 없듯이 지극히 제한된 과학 지식을 갖고 있을 뿐인 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분명 제한이 있었다. 현대인보다 훨씬 덜 이해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모든 고대인들은 만일 지구가 자전을 멈추면 어떤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몰랐다. 현대과학은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몰살할 것임을 알려 줬지만 그들에겐 그런 지식이 없었다. 이런 그들에게 홍해가 갈라지는 것쯤은 시쳇말로 식은 죽 먹기로 여겨졌을 거다. 자기들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에겐 문제될 게 없다고 믿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내 주된 관심은 그들의 과학 지식의 수준이 아니라 그들의 시야 또는 관점의 폭에 있다. 곧 그들이 '왜' '무엇을 위하여' 홍해가 갈라졌고 태양이 멈췄다고 믿었느냐 하는 점이다.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홍해는 자기들이 이집트 군대에게 몰살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둘로 갈라졌고, 태양이 멈춘 이유는 자기들이 한참 아모리인들을 살육하고 있는데 해가 지면 그걸 중단할 수밖에 없으니 그래서 멈췄다는 것이다. 태양이 멈춘 이유치고는 너무 '약소'하지 않은가? 속되게 말하면 자기들의 승리를 위해서 태양이 멈췄다는 건데 그런 엄청난 '초자연적인' 사건의 이유치고는 너무 '사소'하지 않느냐 말이다.

나는 이런 사고를 가능하게 한 것이 고대 이스라엘이 갖고 있었던 '종족주의'(tribalism) 패러다임 때문이라고 썼다. 고대 중동 지역의 모든 종족은 자기 종족만을 위한 신을 믿었다. 신이 자기들만 아끼고 사랑하고 돌본다고 믿었다는 말이다. 이스라엘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자기들이 믿는 야훼라는 신은 자기들을 선택했고 자기들을 특별히 아끼고 사랑해서 축복한다고 믿었다는 점에서는 다른 족속들과 사물과 세상을 보는 패러다임이 다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들이 자기들과 이웃 족속들의 역사를 이해하는 틀 역시 종족주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던 것들도 종족주의가 그 밑에 전제되어 있었다.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자기들을 위하는 신이었다. 자기들과 이웃 족속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우선적으로 자기들을 위해 주고 편들어 주는 신이었던 거다. 우리는 이런 신념을 '종족주의적 신념' 또는 '종족주의적 신앙'이라고 부른다. 신을 생각할 때도 종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원수인 아모리인을 몰살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하나님은 태양도 멈추게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자기들이 가나안 일곱 족속을 어린아이들과 짐승들까지 몰살했다고 믿었고 이집트의 장자들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몰살당했다고 믿었다. 히스기야 시대에 앗시리아 군대 18만 5000명이 몰살당한 것도 하나님이 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들에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하나님이 행한 일이었던 거다.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자기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아끼고 사랑해서 그랬다는 거다. 이게 그들이 갖고 있던 역사관이고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이었던 거다. 야훼 하나님은 자기들을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신이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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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대량 살육은 구약성서에서 어쩌다 일어난 예외적인 '참변'이 아니었다. 물론 구약성서도 일어난 모든 사건이 모조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문창극 씨의 주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구약성서의 역사관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나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한 걸 야훼의 뜻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구약성서가 이스라엘의 바빌론 포로된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이유를 '징벌'로 보기도 하고 '연단'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유가 뭐든 그게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벌어졌다고 말하진 않는다. 오죽하면 남 왕국 유다를 멸망시킨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야훼의 ‘종’이라고 불렀고 그들을 해방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야훼의 기름 부음받은 자, 곧 ‘메시야’라고 불렀겠는가. 구약성서는 이들 이방 족속의 왕들조차 야훼의 ‘뜻’에 따라 행동했다고 믿고 있는 거다. 심지어 이집트의 왕 파라오로 하여금 고집을 부리게 만든 이도 야훼라고 하지 않는가(출애굽기 7:3). 오해하지 마시라. 이것은 야훼가 온 세상을 다스린다는 보편주의적 관점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중심에는 이스라엘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 일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선한 일뿐 아니라 악한 일을 저지른 이도 야훼다. 구약성서는 분명 그렇게 믿는다. 구약성서는 야훼는 선한 일만 하고 악한 일은 야훼 이외의 다른 신(또는 신적인 존재)이 한다고 믿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구약성서는 ‘야훼 일원론’(mono-Yahwism)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야훼가 주관한다. 정의롭고 선한 일뿐 아니라 불의하고 악한 일(처럼 보이는 일)도 궁극적으로는 야훼의 뜻이고 야훼가 한 일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욥이 당한 고통은 어디서 왔겠는가? 느부갓네살과 고레스도 야훼의 뜻을 행했을 뿐이란 주장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따라서 “악과 불의는 결코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나 하나님은 “고난을 허용하시는 분이지, 고난을 창조하거나 제공하시는 분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불행의 제공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권세와 정사들이라는 주장은 적어도 구약성서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신약성서의 세계관과 패러다임에 따른 주장들이다. 이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이런 주장들은 구약성서의 세계관 및 패러다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고? 구약성서의 세계관, 역사관과 패러다임으로 오늘날 벌어지는 사건들을 이해하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구약성서의 패러다임은 상당히 후기로 내려오지 않으면 종족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야훼가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주님이고 온 세상을 공평하게 다스린다는 이른바 보편주의적 사상은 상당히 후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리 잡게 된다. 그때가 되어야 이스라엘은 이디오피아 같은 이방 종속보다 더 나을 게 없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는데 그 전까지는 둘을 비교하는 것만도 그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치욕이었을 거다.

구약성서를 지배하는 역사관에 따르면 우리 겨레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하나님의 뜻인 게 맞다. 6.25뿐 아니라 나치의 유대인 학살도,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한 것도,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폭삭 주저앉은 것도 후쿠시마에 원전이 터진 것도 모두 하나님의 뜻인 게 맞다. 그럼 왜 그렇게 해석이 달라지는가? 그것은 각자 자기가 믿는 종족주의에 따라 사건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광명한 세상에 종족주의 같은 ‘미개한’ 생각은 벌써 사라진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일본의 우익은 여전히 야스쿠니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미국은 9.11에 조기를 내걸지 않는가. 그리고 이런 말하기는 너무도 아프지만 우리 겨레가 베트남에 가서 했던 만행을 사과하자고 하면 전투복 입고 거리로 뛰쳐나오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구약성서가 역사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틀로 오늘의 역사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비록 아직도 종족주의가 살아 있긴 하지만 지금 역사를 그 틀로만 바라봐서는 조롱당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비난받기 딱 알맞다. 그런데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심지어 학자들까지도 종족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역사를 이해하고 성서도 해석하고 그런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성서는 무조건 옳다'는 도그마적 신념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성서에 이해할 수 없고 심지어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많은데도 성서는 무조건 옳다는 도그마적 신념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바탕을 둔 올바른 실천을 못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여지껏 게토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기독교가 세상과 소통하지 못한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그 까닭이 바로 여기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문창극 씨의 주장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비판하는 사람들이 같은 수준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서 보편주의적인 틀이 분명히 보이고 그것에 기반해서 문 씨의 주장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성서의 얘기를 읽을 때는 종족주의적인 틀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종족주의적인 틀 안에서 쓰인 내용을 보편주의적 시각으로 읽고 있기 때문에 모순이 생긴다고 여겨진다. 그렇게 되면 성서를 읽는 데 있어서도 불가피하게 선택적이 될 수밖에 없어서 문 씨를 옹호하는 편은 자기주장에 맞는 대목을 골라 읽고 비판하는 사람 역시 자기주장에 맞는 대목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성서의 세계관, 역사관과 패러다임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당시에는 옳았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고 역사를 이해하고 현재 벌어지는 사건들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곧 구약성서가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텍스트도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패러다임을 고려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크게 오해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구약성서의 패러다임과 거기 기반해서 쓰인 텍스트를 오늘의 패러다임 안에서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해석학'이다. 구약성서의 텍스트가 그때 무엇을 의미했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주석학(exegesis)의 과제라면 그것이 지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탐구하는 것은 해석학(hermeneutics)이 할 일이다.

문창극 씨가 한국 기독교에 던진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성서 텍스트를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이것이 그의 본의는 절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곽건용 / 나성 향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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