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 / 린위탕 지음 / 홍종락 옮김 / 포이에마 펴냄 / 372면 / 1만 5000원

책 제목이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이다. 제목을 보면 회심 과정을 기록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에서 태어나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른(우리나라 독자에겐 이런 경력이 중요하다) 학자이며 저술가인 린위탕(이하 임어당)의 회심기이니 읽을 마음이 생긴다. '이 사람은 어떤 일을 겪고 기독교인이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암에 걸렸다 나았을까?' '1895년에서 1976년까지 살았으니 일본의 침략 과정에서 또는 중국 공산당에게 어려움을 겪었을까?' '어떤 문제를 이겨 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임어당 회심기는 '생각'을 다룬다. 유교, 불교, 도교, 이성주의, 유물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한다. 유교나 불교를 믿다가 유교와 불교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깨닫고 과거의 허탄한 행실을 버리고 기독교인이 되는 방식은 아니다. 저자는 유교와 불교의 장점을 계속 붙든다. 예수님이 공자와 붓다보다 더 뛰어난 분이라고 높이지만 공자와 붓다를 버리지는 않는다. "나는 달콤하고 고요한 생각의 초원을 걸었고 아름다운 계곡들을 보았다. 유교 인본주의의 대저택에 한동안 기거했고, 도교라는 산봉우리에 올라 그 장관을 보았으며, 무시무시한 허공 위에서 흩어지는 불교의 안개를 엿보았다. 그 이후에야 나는 최고봉에 해당하는 기독교 신앙에 올라 구름이 내려다보이는 햇살 가득한 세상에 도달했다.(85쪽)" 대저택(유교)과 산봉우리(도교), 안개(불교)를 품고 햇빛(예수님)을 바라본다.

제목을 <임어당에게 듣는다>라고 바꾸는 게 낫겠다. 임어당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판단할 사람도 많을 테니까. 물론 <임어당에게 듣는다>를 제목으로 정하면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으로>에 견주어 반도 팔리지 않겠지만.

임어당은 구원받았을까

책을 다 읽고 팍 떠오른 생각은 '임어당은 구원받았을까?'이다. 이교도에서 기독교인이 되는 과정을 읽고 이렇게 생각한 까닭이 몇 가지 있다. 저자는 예수님을 뛰어난 인간으로 본다. 사도신경 대부분을 언급하지 않는다. 성부 하나님과 성령님은 아예 나오지 않으며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말도 없고 십자가도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독생자, 죄인의 구원자, 다시 오실 분으로 쓰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고 다 부정했다고 볼 수는 없다.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말하지 않고 '사랑이 최고다'라고 말한다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성급한 판단이다. 임어당도 기독교 교리를 믿었지만 사랑으로 드러난 예수님의 삶을 강조하다 보니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말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볼 때 기독교의 원죄 개념은 너무 신비주의적이다. 첫 사람 아담의 죄는 물론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 같은 육체에서 태어나고 조상들의 결점, 충동, 파괴적인 본능을 물려받는다. 원죄는 우리가 그것을 갖고 태어난다는 사실, 즉 모든 동물과 인간이 식욕, 성욕, 두려움, 증오 등의 본능을 가지고 세상에 입장한다는 의미에서만 원래적인 것이며, 이것은 정글 생활에 꼭 필요한 생존 본능이다. 그러나 모든 아기가 낙인찍힌 범죄자로 태어나 지옥에 갈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원죄'를 신비적인 실체로 만들 필요는 없다."(249쪽) "사랑이 넘치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커다랗고 순진무구한 둥근 눈을 갖고 막 태어난 아기를 지옥에 보낸다는 믿음보다 더 분통 터지는 것도 없다. 그것은 어머니의 본능을 거스른다. 모든 인간의 존엄을 거스른다. 하나님이라도 인간 공통의 존엄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사디스트가 아니다."(250쪽)

임어당은 낙관주의자이다. 나는 유교의 폐해가 우리나라 곳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짓누르는지 보고는 분노한다. 임어당은 유교의 가치를 말한다. 나는 불교가 '허무주의' 아니면 '기복주의'로 몰아가는 현상을 안타까워한다. 임어당은 붓다의 가르침이 얼마나 고귀한지 말한다. 나는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성품과 은혜를 가리는 걸 보고 속이 상한다. 임어당은 예수님이 뛰어난 인물 중에 햇빛과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나는 빈부격차를 만들어 내는 사회 구조와 이를 바꿀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 화가 난다. 임어당은 중국의 정신과 예수님의 마음을 말하지만 인간의 내면을 벗어나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임어당도 비판하고 싸우는 대상이 있다. "오늘날 세계의 진정한 무정부 상태는 중국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에 있다. 중국인들은 그 영향에 시달리고 있을 뿐이다."(70쪽) 유럽과 미국의 무엇이 임어당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태어나고 자란 과정을 쓴 1~2장, 유교와 도교와 불교를 다룬 3~5장까지는 부드럽고 따뜻하다. 6장, '종교에서의 이성'은 차갑고 날카롭다. 7장 '유물론에의 도전'에선 냉소와 분노도 보인다. 임어당은 종교에서 이성과 논리의 역할에 반대하여 싸운다. 종교를 스콜라철학적인 방식으로 다루면 안 된다고 말한다. "과학적 방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종교의 영역에서는 그지없이 부적절한 방법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언제나 유한한 용어로 무한을 정의하고, 자신이 다루는 주제의 본질을 모른 채 영적인 것들을 물질을 대하듯 이야기하고 싶어한다(260쪽)"고 지적한다.

7장에서는 할아버지가 젊은 세대의 변화를 두고 '혀를 차며 꾸짖듯이' 질책한다. 그런데 스스로를 구닥다리 노인이라며 내놓는 생각이 마음에 든다. 물리화학적 설명이 '어떻게'는 보여 주지만 '왜'는 보여 주지 못한다(313쪽)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진화론에 대한 반박에는 감탄한다. 과학자는 생명을 분석하지만 철학자인 임어당은 자신의 논리로 진화론의 허점을 찌른다. 3~5장에서 유교, 도교, 불교를 설명한 내용을 보고 박식함과 생각의 깊이에 놀랐는데 진화론에 대한 생각을 읽으면서 감탄했다. 동서양 철학자, 과학자, 음악가, 미술가와 사회 현상을 넘나드는 지식과 분석력에 혀를 내두른다.

그렇지만 칼뱅의 교리로 보면 임어당은 구원받지 못한다. 칼뱅의 교리가 하나님 뜻에 100% 맞는 완벽한 설명은 아니지만 기독교가 인정하는 기본 교리임에 틀림없다. 임어당은 칼뱅의 5대 교리를 부정한다. "인간이 만들어 낸 철학 체계에 근거한 온갖 환상적인 교리들(극장의 우상), 그중 하나가 칼뱅의 '전적 부패' 교리다(265쪽)." "예수의 말씀에는 신비한 정의도 없고, 위험한 추론도 없고, 자기기만적인 변증법도, '5대 교리'도 없다." 이쯤 되면 이 책은 읽지 말아야 할 책이라고 금서 목록에 올릴 사람도 있겠다. 5대 교리가 없다는 문장에 이어지는 내용을 계속 보자. "… 예수의 말씀을 분석하면 망치게 되고, 그 내용을 보완하면 못 쓰게 된다. 신학자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라도 예수의 마음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토론에 들어가면 어조와 목소리가 달라진다. 영혼의 일들을 물질적인 일들처럼 말하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342쪽)." 임어당은 신학자들의 분석과 설명이 서양식 사고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동양식 사고를 갖고 포스트모더니즘처럼 여러 종교의 장점을 받아들인 것 같다.

임어당이 칼뱅의 교리를 뒤집어엎을 정도로 옳은 건 아니다. 죄를 언급하지 않고, 십자가 구원도 말하지 않고, 예수님을 뛰어난 인물 이상으로 보지 않았으니 임어당은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책을 쓰고 17년을 더 살았으니 그동안 생각이 바뀌어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0.1%의 가능성이라도 좋으니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면 좋겠다. 구원받았느냐 아니냐의 여부를 판단하지 말고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임어당의 생각을 '현재 기독교가 갖고 있는 경직되고 편협한 사고를 돌아보는 계기'로 보면 어떨까? 이런 생각마저도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타협하고 깨뜨리는 시도가 될까?

바리새인과 선지자의 외침은 어떻게 다를까

예수님이 비난하기 전까지 바리새인은 최고의 종교인으로 인정받았다. 철저한 자기 관리, 율법을 한 치라도 어기지 않고 행하는 순종,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 관점에서 바라보는 마음을 가졌다. 목숨 걸고 잘못을 지적했으며 로마의 권세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바리새인은 말씀을 지키며 백성에게 죄악에서 돌이키라 외쳤다. 선지자들이 한 일이 아닌가? 선지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죄에서 돌아오라 외쳤다.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미움받았다. 맞고 죽기도 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교만과 외식을 비판하기 전까지 그들 스스로는 선지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칫 교리 문제가 바리새인을 길러 내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다.

교리 문제는 민감하다. 그러나 이 책을 교리만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좋겠다. 자극적인 간증이 판을 치는데 뒤를 돌아볼 줄 알면서 앞을 내다보는 사람의 간증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믿었느냐?'로만 보고 미래를 '믿느냐?'로만 판단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라서 들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간증문이 아니라 세계관에 관한 책이다. 유교와 도교와 불교에 대한 생각을 팍 깬다. 나는 동양 사상에 관한 책을 여럿 읽었다.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책은 더 많이 읽었다. 그런데도 임어당이 말하는 유교, 도교, 불교를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임어당이 올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갖추지 못해서 잘못 판단한 부분도 많지만 배울 점도 많다.

책을 번역한 홍종락 님도 역자 후기에서 "책을 보고 어떤 이들은 그의 신앙고백 내용이 문제가 많다고 그를 '기독교인'으로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361쪽)", "올바른 신학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삶의 모습으로 그 신학의 정당성과 가치를 자연스럽게 드러냈다면 이런 책 굳이 번역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긴, 그랬다면 애초에 이런 책이 나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정답을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362쪽)"라고 한다. 책을 읽고 임어당이 천국에 갔는지 못 갔는지 따지지 말고 "린위탕은 자신의 격에 맞는 기독교를 원했던 것 같다. 이것을 교만의 징후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수십 년 경험하고 지켜본 기독교의 문제점을 피하고 싶은 실존적인 몸부림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364쪽)" 하는 번역자의 마음으로 읽으면 좋겠다.

초대교회는 서로마제국을 발판으로 뻗어 나갔다. 만약 동로마제국(동방)에서 기독교가 발전했다면 어땠을까? 중국 학자 임어당이 비판한 스콜라주의 철학적인 방식 즉, 이성과 합리적 논리가 아닌 동양식 사고로 교리를 설명하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면 어떤 모양일까 궁금하다. 이런 생각이 하나님의 진리 자체를 바꾸는 도전이라면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서양식 분석과 판단에 의해 나타나는 차갑고 딱딱한 바리새적인 판단을 치유하는 대안을 만든다면 생각해 볼 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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