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 프로젝트> / 브라이언 맥클라렌 외 지음 / 김복기 옮김 / 대장간 펴냄 / 384면 / 1만 5000원

새 술이냐 새 부대냐

예수님은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형식적 유대교는 하나님의 복음을 담아낼 수 없었다. 우리는 바리새인을 비판하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가장 믿음 좋은 무리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새 복음이 되셨다. 복음은 완전하다. 복음은 영원하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며 영원히 그렇다. 예수님은 새로운 술을 담아내는 새로운 부대를 보여 주셨다.

복음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역사와 문화가 각기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여전히 복음이 되셨다. 아프리카에선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미국에선 전자 악기로 찬양한다. 유럽에선 파이프 오르간으로 찬양한다. 교회 건물 모습, 예배 순서, 사람들이 입는 옷…은 모두 다르지만 같은 복음을 믿고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 서로 인정하고 여기서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않다. 근본주의부터 자유주의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무리가 저마다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한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가 복음을 잃고 세상 문화와 타협해 버렸다고 비난한다. 자유주의는 근본주의가 말로만 복음을 외치며 복음을 실천하는 일과 세상의 정의에 눈을 감아 버렸다고 비난한다.

"20세기 복음주의자들은 자기규정을 위해 애쓰면서도 사회정의에 대해서는 가야할 길을 벗어났다. 이렇게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성격을 잘못 규정하고 있는 가운데, 자유 진영이 사회정의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자유 진영은 성경에 강조점을 두지 않았고, 반면 복음주의 진영은 성경, 예수, 복음주의를 강조하면서 사회정의를 종교의 우선순위 목록에서 삭제해 버렸다."(76~77쪽)

한쪽은 부대가 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다른 쪽은 부대 신경 쓰다 술까지 변질시켜 버렸다고 맞받아친다. 음식이나 옷에 대한 선호도 문제라면 '개성의 차이'라고 받아들이겠지만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것이니 그럴 수 없다. 당연히 다툰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하나님이 의를 이루시는 과정에 은혜로 동참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의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의를 위해 일한다. 하나님은 완전한 은혜, 완전한 의로 일하시지만 우린 이렇게 못한다. 정의를 빼놓은 복음만을 말하거나, 복음을 놓치고 정의만 외칠 위험이 크다. 양쪽 사이에서 중도를 따르면 복음도 정의도 놓치고 어정쩡하게 사는 것 같다.

<정의 프로젝트>는 정의를 말한다. 여러 분야에서 오랫동안 정의를 실천하고 있는 활동가를 선정하고 원고를 모았다. 미국 위주의 정의가 아니라는 점은 필진에서도 나타난다. 미국 국적 백인은 몇 명 안 된다. 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계 형제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이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필자들은 고통당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한다. 편견, 사회구조의 모순, 갱단, 마약…이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는 걸 직접 겪었다. 고통과 죽음 가운데 허덕이는 사람들과 함께 지낸다. 이런 환경에서 사역한다면 누구나 정의를 먼저 말할 것이다. 이웃을 괴롭히고 죽이는 부정의를 눈앞에서 본다면 부정의에서 나오는 혹독함에 분노할 테니까.

<정의 프로젝트>에는 '이머징'이라는 낱말이 자주 나온다. 많은 필자가 이머징 관련 단체에서 일한다. D. A. 카슨과 존 파이퍼는 이머징 교회를 비판한다. 이머징 교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진리의 절대성과 객관성을 상실하고 있음을 크게 우려한다. 카슨은 이머징 교회 리더들에게서 근본주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저항성이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지적하며, 맥아더는 이머징 교회가 정통 개신교와 어울리지 않는 신비주의적 영성을 혼합시키고 있다고 일갈한다.(관련 기사 : 이머징 문화와 이머징 교회) 그러나 이머징 교회 중에 지나치게 멀리 가 버린 일부만 보고 내린 판단인 것 같다.

<정의 프로젝트>는 복음이 가져오는 정의를 말한다. '복음'을 말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복음의 원리를 강조하는 쪽에서 보면 하나님 없이 정의만 외친다고 판단할 것이다. <정의 프로젝트>에 글을 쓴 35명의 필자들은 '하나님과 복음'은 당연한 이야기여서 그 다음을 말하는 것 같다. 굳이 복음을 말하지 않아도 복음이 가져오는 정의, 하나님나라의 정의를 말한다. 누가 옳은지 따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복음을 말하지 않았으니 진리를 떠났다고 보지 말고, 하나님이 얼마나 정의를 원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춰 읽어야 하지 않을까!

책 내용

책은 서문(짐 월리스), 서론(브라이언 맥클라렌), 1부 정의의 하나님(필자 5명), 2부 정의의 책(5명), 3부 미국에서의 정의(7명), 4부 정의로운 세상(9명), 5부 정의로운 교회(6명), 결론(3명)으로 구성되었다. 1부는 1장 하나님의 정의, 2장 의로운 아들, 3장 정의의 성령님, 4장 정의의 전통(교회사에서 정의를 추구한 교회들), 5장 정의를 (해체)건설하기이다. 5장이 독특하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변화가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긍정적인 영향을 썼다. 책 전체가 비난당할 거라 예상하고 쓴 변증문 같다.

2부는 6장 미국 교회가 성경을 공평하지 못한 시각으로 읽어 왔다. 7장 정의로운 모세오경 8장 정의의 예언자들, 8장 복음서가 말하는 정의란 무엇인가? 9장 사도들이 기록한 서실들을 통해 본 정의를 말한다. 부제만 봐도 알듯이 성경을 정의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3부는 미국에서의 정의를 다룬다. 아프리카 형제, 아메리카 원주민, 백인, 남미 출신으로 인종이 다른 필진이 썼다. 11장을 쓴 앤소니 스미스(아프리카계)의 글이 독특하다. 예수님이 군대 귀신을 쫓아낸 사건을 '로마 군대가 지중해로 빠져드는 모습'으로 해석했다. 우리 역시 제국(미국)의 공동묘지에 서 있다고 한다. 필자의 생각이 독특해서 제대로 전하기 어려워 마지막 몇 문장을 인용한다. "결국 미스터 찰리는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국가 귀신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마귀는 기도와 금식으로만 쫓아낼 수 있다. 이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만 주시는 분별 의식과 열정을 필요로 한다. 12장은 아메리카 원주민 필자가 '잃어버린 땅'을, 13장은 백인 필자가 '정의로운 선거'를 말한다. 14, 15장은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각기 '정의로운 진보 정당'과 '정의로운 보수 정당'의 장점과 약점을 썼다.

앞에서 이 책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16장은 아니다. 혼란스럽다. 16장은 '비전통적인 가족(남녀 결혼 이외의 관계)'을 다룬다.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성 전환자들(LGBT)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일하는 페기 캄폴로는 "정의는 우리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르는 전통적인 방식 안에서 가족의 권리를 찾고 LGBT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결혼을 존중하고 확실히 하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요구한다. 또한 정의는 동성애자 결혼에 관해 양쪽이 서로 강요하지 않는 가운데,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한 타협안을 찾아보라고 요구한다(181쪽)"고 썼다. 이렇게 주장하면 '과연 성경을 제대로 믿는 사람일까?' 의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성경에는 정의가 1060번 언급될 동안 성적인 죄는 60번밖에 언급되지 않았다는 걸 안다. 그래도 16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4부 18장에서는 정의로운 세계 시민이 되기 위한 실제적인 제안을 한다. 보복적 정의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를 추구하자고 한다. 19장은 페루 출신 다리오 로페즈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을 부자들의 정의의 문제가 되게 할 것인가?"를 말한다. 20장은 정의로운 사업, 21장은 정의로운 생태학, 22장은 정의로운 종교, 23장은 정의로운 도시, 25장은 슬럼 속에서의 정의, 26장은 정의로운 도시 주변, 27장은 정의로운 시골을 다룬다.

5부는 주제가 '정의로운 교회'이다. 27장 : 사회정의라는 주제에 대해 미국 복음주의자들을 어떻게 깨울 것인가? 28장 : 흑인 인권 운동 이후 미국 흑인 교회를 위한 정의 29장 : 정의를 추구하는 비용을 어떻게 치르며 어떻게 정의에 참여할 수 있을까? 30장 : 정의로 세워지는 교회들 31장 : 부모로서 어떻게 정의라는 가치를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 32장 :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정의롭고 부자들에게는 의미 있는 무역, 공정무역이 이어진다.

33장 : 정의로운 희망-불의에 대한 좌절과 분노로부터 어떠한 선을 이룰 수 있을까? 34장 : 개인과 믿음의 공동체들이 정의를 실현하려 할 때 첫발을 내딛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일까? 35장 : 정의가 새 시대의 이머전트 대화의 핵심 내용이 될 수 있는가? 라는 글이 결론으로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는 게 먼저다. 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게 먼저다' 하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르고 죽는 사람, 부정의에 떠밀려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복음을 온전히 아는 사람은 소외되고 굶주린 사람을 위해 일한다.

"왜 바리새인들은 예수에 대해 그렇게 격노했을까? 결국 그들은 모든 가난한 사람을 위해 기금을 마련하고 배고픈 죄인들을 먹이는데 자신들을 헌신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는 자신들과는 달리 예수가 죄인들과 함께 먹었다는 것에 있다. … 바리새인들에게 가난한 사람, 굶주린 죄인들은 '자비'를 행할 대상으로서 필요할 뿐이었다(146쪽)."

체로키 부족 랜디 우들리의 말이다. 하나님이 내게 많이 주셨으니, 가진 것 없는 너희에게 나눠 준다는 자존심 만족시키는 수준이 아니라 함께했다. 누가 옳으냐 따지지 말고 우물에 빠진 양을 일단 구해 내야 하지 않을까!

"내가 훈련 받은 것처럼 대부분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예언자적 시각이 아닌, 제사장적 시각으로 성경을 읽도록 훈련받아 왔다. 이것이 바로 독자들이 개인적인 칭의라는 제사장적 주제에 관심을 갖는 반면 사회정의라는 예언자적 주제를 무시하는 이유이다. 그들은 공적인 정책보다는 개인적인 신앙심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축복하는 존재가 되기보다는 축복받는 존재가 되는 것에 관심이 많고, 원수를 섬기고 사랑하기보다는 빨리 폭탄을 던져 버리고, 우선적으로 정의를 추구하기보다는 정의를 교묘히 회피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도록 훈련받아왔다(114쪽)."

덧붙여) 지니 지표(지니 계수)를 '기니 지표'라고 했고 '건2강한'에 숫자 2가 들어가 있다. 이 외에도 오탈자가 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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