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1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제19대 대표회장에 홍재철 목사(경서교회)가 당선됐지만, 한기총 안팎 분위기는 뜨뜻미지근하다. 홍 목사는 지난 2012년 교단장 순번제 폐지로 17대 대표회장인 길자연 목사(왕성교회)의 뒤를 이었고, 지난해에는 대표회장의 임기를 2년 연임제로 고치며 재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를 놓고 일각에서는 한기총의 설립 목적과 존재의 이유가 사라졌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한기총 설립 취지, "개신교 사회적 발언 통일, 이단 문제 공동 대처"

한기총은 고 한경직 목사를 비롯해 강병훈․강원용․정진경 목사 등이 중심이 돼 10개월간의 준비 작업 끝에 1989년 12월 28일 서울 강남침례교회에서 창립총회를 연다. 명예회장은 한경직 목사가, 1대 대표회장은 박맹술 목사가 맡았다. 창립 당시 36개 교단과 6개 단체가 가입했는데, 당시 6개 교단으로 구성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의 규모를 훌쩍 넘었다.

한기총 출범을 놓고 정부가 교회협의 민주화 운동을 견제하기 위해 개신교 보수 세력을 내세웠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초대 한기총 사무총장(1989~1993)을 지낸 김경래 장로는 개신교에 정부 시책과 이단 문제에 관한 통일성이 없었기 때문에 협의체가 구상된 것이라고 했다. 김 장로의 저서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홍성사)에 따르면 "한기총은 보수와 진보로 나뉜 한국 개신교계가 하나로 연합하여 대정부 및 대사회적 발언을 통일함으로써,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던 물질중시․교세확장주의와 기복 신앙을 바로잡는다는 큰 뜻을 표방했다"고 나온다.

▲ 복음 전파를 위해 설립된 한기총은 정치적 우경화로 치달은 지 오래다. 이와 함께 2011년 금권 선거 사태에 이어 2013년에는 이단 해제 논란에 휩싸였다. 이는 예장합동, 고신 등 주요 교단의 탈퇴로 이어졌다. 급기야 한기총이 더 이상 교계를 대표하는 연합 기구가 아니라 군소 교단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초기 한기총은 연합 단체를 표방한 만큼 '직책' 안배에 신경을 썼다. 대표회장은 회원 교단별로 돌아가면서 맡게 하면서 특정 교단이 독점하지 못하게 했다. 홍재철 목사가 대표회장 임기 문제를 놓고 숱한 비난을 받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관련 기사 : 한기총, 홍재철 대표회장 연임 위해 정관 개정)

1991년 12월 2일 당국으로부터 사단법인 허가를 받은 한기총은, 민주화 운동과 사회 구원에 매진한 교회협과 달리 철저한 복음주의적 신앙고백을 앞세워 활동했다. 1990년대 초에는 산하에 사랑의쌀나누기운동본부를 설치해 국내뿐 아니라 북한․몽골․인도․필리핀 등에 쌀을 지원하며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선교뿐 아니라 사회․문화․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을 펼쳤다. 환경 보전, 정직․절제․사랑 실천, 북한 동포 돕기, 월드컵 유치, 경제 살리기, 단군상 건립 반대 및 철거 등 다방면에 걸쳐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등 정치적으로 보수 색채를 감추진 못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사회적 이슈와 맞물리며 한기총의 우경화 행보는 급물살을 탔다. 한기총은 지난 2003년 1월 11일과 19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 기도회'를 열고 '주한 미군 철수 반대'를 주창했다. 이는 당시 미군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으로 촛불이 들불처럼 번지자 맞대응 차원에서 기획한 것이다.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 금란교회, 왕성교회 등 대형 교회 교인 4만여 명을 동원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기총은 보수 우익 세력을 대변하는 집단으로 각인되었다. 대표적으로 2006년 참여정부가 추진했던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 논의와 사립학교법(사학법) 개정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한기총은 극우 단체와 손을 잡고 대규모 집회를 열어 전작권 환수 반대와 사학법 재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산하에 국회의원낙선운동본부를 구성하고,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반대하는 국회의원을 상대로 낙선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보수 시민 단체와 함께 차별 금지법 입법 반대에 앞장서 입법을 저지하기도 했다.

금권 선거 폭로 사건부터 한교연과의 분리까지

▲ 금권 선거 폭로는 내부 갈등에 이어 한기총 해체 운동으로 이어졌다. 2011년 금권 선거가 있었다는 양심선언에서 돈을 뿌린 것으로 지목된 길자연·홍재철 목사. 그러나 두 목사는 금권 선거는 없었다고 한사코 부인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창립 22주년인 2011년, 한기총은 금권 선거 폭로와 함께 골육상쟁으로 치닫게 된다. 같은 해 2월 9일 이광선 목사(신일교회)가 16대 대표회장 선거에서 금권 선거를 치러 당선됐다고 고백한 게 발단이 됐다. 이 목사의 폭로 시점은 이미 두 차례 대표회장을 역임한 길자연 목사가 17대 대표회장에 취임한 직후였던 탓에 길 목사 측은 마치 17대 선거에서도 금품이 오간 것처럼 비춰졌다며 비난했고, 17대 선거에서 길 목사 측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두 건의 증언이 나오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금품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당사자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길 목사의 선거운동원이었던 홍재철 목사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 홍 목사는 "그런 적 없다"며 부인했지만 여진은 지속됐다. (관련 기사 : 한기총과 한국교회, 금권 선거 폭로로 휘청)

이광선 목사 측과 길자연 목사 측으로 나뉘어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정관 개정 문제는 분열을 불러온다. 한기총은 기존 대표회장의 임기를 1년에서 2년으로 늘렸고, 각 회원 교단이 돌아가면서 맡기로 한 대표회장 순번제를 폐지했다. 이에 따라 홍재철 목사는 같은 예장합동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길자연 목사에 이어 2012년 2월 14일 18대 대표회장에 오른다. 한기총정상화를위한대책위원회는 이에 반발하며 같은 해 3월 29일 한교연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각기 다른 길을 걷는다. 현재 한교연은 예장통합·고신·백석, 기성 등 34개 교단과 10개 단체로 이뤄져 있다.

연합 기구, 이단 세탁소로 전락하다?

▲ 한기총은 정치 활동에도 적극 관여했다. 2007년 8월 21일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명박 후보가 한기총을 방문해 지지를 호소했다. 이 후보가 "한나라당 경선에서도 힘들었습니다. 본선에서는 더 힘들 것 같습니다. 많은 기도를 부탁합니다"라고 말하자, 이용규 대표회장은 "어려운 시간 보내셨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대선도 승리하실 줄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한기총의 분열은 진행형이다. 이는 이단 '해제'와 관련이 깊다. 한기총은 2010년 해체한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대위)를 2012년 10월 25일 부활시킨다. 부활한 이대위는 이단 연구와 대책보다는 해제 작업에 착수했다. 각 교단으로부터 이단 판명을 받은 이들을 재심하겠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 결과 2013년 1월 다락방 류광수 목사를 해제하기에 이른다. 같은 해 12월 한기총 산하 이단사이비대책특별위원회는 예장통합과 합동이 이단으로 규정한 박윤식 원로목사(평강제일교회)도 이단에서 해제했다.

이단 해제는 주요 교단들의 탈퇴로 이어졌다. 가입 교단 중 규모가 가장 큰 예장합동 임원회는 지난해 12월 18일 이단 해제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는 의사를 표하고 탈퇴를 결의했다. 고신 임원회도 "한기총의 파행적인 행정과 이단을 옹호하는 신학적인 문제가 더욱 심화됐다"면서 12월 26일 탈퇴를 결의했다. 한편으로는 주요 교단의 탈퇴 움직임과 함께 '과연 한기총이 교계를 대표하는 연합 기구라고 할 수 있느냐'는 대표성 논란이 불거졌다.

한기총의 대표성 논란보다 더 큰 문제는 예장합동 총회를 중심으로 한 제4의 연합 기구 결성이 추진된 것이다. 이단 문제로 인해 한기총을 탈퇴한 예장합동과 고신, 합신 등 7개 보수 교단 전·현직 총무는 1월 3일 제4의 연합 기구인 '기독교한국교회총연합회'(가칭) 준비위원회를 출범했다. 그러나 새 연합 기구 출범에 대한 교계 여론은 회의적이다. 명분이 없고 오히려 한국교회의 고질병인 분열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것이다. 미래목회포럼(오정호 이사장)은 1월 10일 '2014 한국교회, 길잃은 연합 운동의 향방?"이라는 주제로 긴급 좌담회를 열고 새 연합 기구는 초교파적인 차원에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기총, 어떻게 변해야 할까

초기 한기총 설립 작업에 참여하고 실무를 관장했던 이들은 현재 한기총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볼까.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한 김경래 장로는 함량 미달의 일부 목사들이 감투만 바라보고 활동하는 탓에 한기총이 혼란에 휩싸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장로는 한기총이 초창기의 정신으로 되돌아가 대표회장과 위원장 등 직책에 연연하지 않고, 섬기는 모습을 보일 때라고 했다.

초대 총무를 역임한 고 한명수 목사는 2010년 1월 8일 <뉴스앤조이>와의 인터뷰에서 금권 선거를 비롯해 검증되지 않은 교단과 기관의 가입 문제, 정치적 우경화 등을 한기총이 해결할 문제점으로 꼬집었다. (관련 기사 : 한기총 초대 총무가 본 2010년 한기총)

2006~2009년까지 총무를 역임한 최희범 목사(CTS 상임고문)는 권력 집단이라는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창립 정신처럼 성경 중심․복음주의적 가치관을 수호해야 한다고 했다. 최 목사는 교회협과의 연합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이념과 성향의 차이점은 인정하더라도 사회를 향한 한국교회의 입지와 위상을 위해 함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올해 25살이 된 한기총은 여전히 덩치로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큰 연합 단체이지만 영향력과 위상은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다. 다시 대표회장이 된 홍재철 목사는 한교연과 통합을 이루고 물러나겠다고 한 공약은 그런 위기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기총이 한국교회의 골칫덩이란 이미지를 벗어내려면 외면받게 된 근본적인 이유부터 찬찬히 들여다보는 게 바른 순서이지 않을까.

▲ 한기총은 지난 2007년 사학법 개정 추진을 강하게 반대하며, 사학법을 재개정하라고 촉구했다. 사진은 한기총이 같은 해 6월 23일 주최한 사립학교법 재개정 특별 기도회의 모습. 김삼환 목사(명성교회·사진 왼쪽)와 이광선 목사(사진 오른쪽·신일교회)가 사학법 재개정을 요구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이날 특별 기도회에 나선 이들은 사학법 개정은 북한의 노림수이며, 전교조가 학교를 탈취하기 위해 개방형 이사를 투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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