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하나님인가?

아마 기독교의 역사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존재라면 한국에서 해방 이후 등장한 '반공 목사'라는 존재가 아닐까? 반공 목사들은 '가스통 할배'와 '신나치 일베'의 무리 속에서 항상 지도적 역할을 자임해 왔다. 그들은 골방 샌님인 뉴라이트보다는 훨씬 행동적이어서 더 실용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들은 보수 정권의 나팔수가 되어서 촛불 집회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군가인지 찬송가인지 아니면 유행가인지 도무지 구분되지 않는 노래를 불러 왔다. 이런 반공 목사들이 중심이 되어 지난 10월 26일에는 박정희 추모제를 거행한 모양이다.

이 추모제에서 반공 목사들은 박정희를 가난에서 민족을 구한 의인으로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모세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독재자 박정희가 억압으로부터도 이 민족을 해방시켰다고 한다. 심지어 반공 목사들은 하나님이 독재하듯 대한민국에도 독재가 필요하다고 한다. 박정희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니까 그가 하는 독재는 인간의 독재와 달리 정당하다는 논리이다.

반공 목사들과 보수의 이론가 자리를 놓고 다투는 뉴라이트는 박정희가 비록 독재는 했지만 그래도 경제적인 성장은 이룬 것이 아니냐고 주장해 왔다. 이런 뉴라이트식 박정희 찬양 논리라면 굳이 고민해 볼 것도 없다. 히틀러를 참조해 보라. 그도 1차 대전 이후 경제공황 속에 허우적거리는 독일 경제를 구했다고 말해진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누구도 히틀러를 찬양하지는 않는다.

이런 뉴라이트식의 찬양은 적어도 논리라는 것은 있는데 반해, 반공 목사들의 찬양은 논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그들은 박정희를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찬양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하나님에 비교되는 것은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편집증적인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정통 기독교의 교리로 본다면 이처럼 반기독교적인 주장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름 아닌 정통 기독교를 자처하는 목사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이것이 한국 기독교에서 용인되는 분위기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 26일 강남 도곡동 서울나들목교회에서 열린 제1회 박정희 대통령 추모 예배에서 김영진 원미동교회 원로목사가 "한국은 독재를 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미디어몽구 영상 캡쳐)

목사와 야채장수

필자는 이런 편집증적 신앙을 가진 반공 목사라는 존재에 구미가 동한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이런 의문 앞에 떠오르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얼마 전 페이스 북에서 보았던 사진이다.

그 사진을 보면, 선거용 스피커를 달고 시내를 질주하는 야채 장수용 트럭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고 두 명의 반공 목사가 홀딱 벗은 채 올라타고 있었다. 그들은 연도에서 놀라서 쳐다보는 시민들에게 '종북 타도'를 목이 쉬도록 외치고 있었다. 필자는 이 사진이야말로 반공 목사라는 존재를 가장 정확하게 폭로해 준다고 생각한다. 우선 생각해 보자. 그들은 왜 야채 장수의 트럭을 타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이 점은 한국적 목사의 생동성과도 연관된다고 본다. 종교 제도라는 것이 나라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독일에는 신도의 헌금이라는 것이 없다. 국가가 종교세라는 것을 걷어서 각 종교에 할당하여 준다. 그러다 보니 독일에서 성직자들은 목사든, 신부든 대중들에게 전도하는 데 별로 애쓰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에서 종교는 그 가운데서도 특히 개신교는 신도들의 헌금에 기초한다. 한국에서 목사는 헌금을 내고자 하는 자발적인 신도들을 만들기 위해 정말로 눈물겹게 노력한다. 이 점은 대부분의 재정 수입을 관광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의 불교가 대중들에 대한 전도에 무덤덤한 것과 비교해 보면 잘 이해될 것이다.

그 결과 한국에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대중들의 종교적 요구를 파악하고 이를 충족시키려 하면서 엄청난 생동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개신교 목사들의 모습은 시장에서 야채를 팔기 위해 목이 쉬라고 외치는 장수들의 모습을 닮게 되었다.

사진에 보이는 스피커를 매달고 십자가를 치켜든 야채 장수의 트럭이란 바로 대중들을 찾아가는 떠돌이 장수들의 애환을 담고 있어 심지어 애틋하게 보이기도 한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들의 핏속에는 장터를 쫓아 밤을 새워 걸어가는 보부상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공포의 상품화

그러나 변증법적으로 본다면 사물에는 항상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장점이라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단점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목사들이 대중들을 찾아가는 힘은 때로는 한국 기독교의 생동적인 힘이 되었지만 때로는 한국 기독교의 절망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대중들의 진정한 종교적 욕구를 찾아내려 하기보다는 대중들을 유혹하여 기독교라는 자신의 상품을 판매하려 한다.

종교적으로 대중을 유혹하는 가장 유리한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대중을 협박하는 것이다. 그들은 닥쳐오는 파국을 경고하면서 대중을 공포로 밀어 넣고 이 공포를 벗어나기 위하여 종교라는 약을 사서 먹으라 한다. 이런 공포의 장사꾼은 서구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흔하게 발견된다. 그 단적인 예가 14세기 페스트가 만연했을 때 서구 기독교가 벌였던 마녀사냥이었다. 그런 마녀사냥의 한국판이 곧 기독교의 반공주의이다.

반공 목사들의 경쟁력은 자신의 기독교가 얼마나 아름답고 진실한 것인가를 밝히는 데 있지 않다. 그들의 경쟁력은 대중을 유혹하는 능력에 있다. 즉 그들은 대중의 공포감을 얼마나 절실하게 불러일으키느냐를 가지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 그러므로 반공 목사들이 경쟁하는 상대는 진정한 기독교 목사는 아니다. 그들이 경쟁해야 하는 상대는 그들 못지않게 강력한 공포의 장사꾼 곧 종말론 목사이다. 서구에는 주로 종말론자가 시장을 주도한다. 그러나 한국에는 권력의 지형 때문에 북한에 대한 대중들의 막연한 공포심이 존재한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세계 기독교상 독특한 반공 목사가 시장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경쟁은 극심하다. 너무 많은 목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중의 북한에 대한 공포심도 약화되고 있다. 극심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공 목사들의 몸부림도 극심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마침내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옷을 홀딱 벗었다. 일단 눈길을 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화제 때마다 가난한 여배우의 의상이 흘러내리는 실수가 반복되는 이유와 같다. 벌거벗은 채로 트럭을 타고 '종북 타도'를 외치는 반공 목사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 사이의 극심한 경쟁이 정말로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박정희에 대한 신앙고백

권력과의 결탁은 반공 목사들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즐겨 사용해 왔던 또 하나의 수단이었다. 권력과 결탁은 자유당 시절 정점에 이르렀다. 이승만 시대 자유당은 이런 반공 목사들이 주도가 되어 결성했던 정당이다. 이 자유당을 통해 반공 목사들은 이승만의 독재를 지지해 주고 그 대신 교회의 성장이라는 대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번 추모제에서 나온 박정희 찬양은 자유당 시절 반공 목사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은 결코 단순히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이라는 수준을 뛰어넘는다. 이것은 이미 반기독교적인 주장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포의 장사꾼이라는 반공 목사의 진정한 본질을 폭로해 준다고 생각한다.

반공 목사들이 대중들의 공포를 자극할 때 거기 하나님은 더 이상 존재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은 그들의 추악한 현장에서 이미 떠나셨다. 지금까지 반공 목사들은 하나님이 떠나셨다는 것을 몰랐으나 이제 드디어 무의식적으로나마 이를 깨달은 것이다. 그들에게 사라진 하나님은 무의식적인 환영으로 그들에게 되돌아온다. 이렇게 되돌아온 환영의 신이 바로 박정희 신앙인 것이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박정희라는 신앙인가. 고려 시대 비극적으로 살해된 최영 장군이 그 후 무당들의 가장 중요한 신이 되었던 것을 기억해 보자. 자신의 부하에 의해 10월 26일 살해된 박정희야말로 환영(幻影)의 신으로서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 아닐까. 박정희가 총살된 10월 26일 박정희에 대한 신앙고백이 일어났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병창 / 동아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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