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작은 심히 미약하였으나

"네 시작은 심히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우리나라 성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이다. 이 구절을 쓸 때마다 저작권료를 받았다면 발닷은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이 한 말을 정당하지 못하다(욥 42:7)고 꾸중하셨다. 정당하지 못하다고 하나님이 꾸중하신 발닷의 말을 성도들이 좋아하는 까닭은 '창대하리라' 때문이다. 잘되기만 바라는 성도들은 앞뒤 내용 살펴보지 않고 창대해진다는 말만 보고 액자를 사서 걸었다.

좋아하는 말씀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여 준다. 북한 선교에 평생을 바친 목사님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목숨을 걸었다.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는 말씀 때문에 고아와 난민을 돌보는 사역을 감당하는 분도 있다. 상처받은 사람은 위로를 주는 말씀을 찾고, 돈을 구하는 사람은 '창대하리라'를 찾는다. 내가 좋아한 한 구절을 돌아보면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는지, 하나님께 무엇을 구했는지 안다.

한 구절은 한 사람에게서 나온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노래가 다르다. 좋아하는 계절, 음식, 취향, 색깔 모두 다르다. 좋아하는 구절도 당연히 다르다. 아무리 좋은 구절이라도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지는 않는다. 하나님 말씀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부분을 좋아한다. 한 사람이 좋아하는 구절도 계속 달라진다. 멋진 구절 하나만으로는 얼마나 멋진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 구절을 좋아하는 사람의 형편, 생각, 느낌, 반응을 따져 봐야 얼마나 멋진지 안다.

<내 삶을 바꾼 한 구절>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책에 나온 구절이 왜 좋은지 알려면 저자를 알아야 한다. 사람을 알면 한 구절의 의미가 더 풍성해진다. 또한 책을 읽으면 박총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 저자는 특이하다. 말총머리를 한 40대를 받아들이는 시대이지만 휴대폰과 자동차 없이, 특별한 직장도 없이, 간호사인 아내가 일하는 동안 네 아이 돌보는 주부 노릇하는 아빠는 신기할 수밖에 없다. 저서인 <밀월일기>는 아내를 사랑하는 모습이 어찌나 닭살스러운지 남편들에게 금서로 알려졌다. <욕쟁이 예수> 제목만 보고 "어찌 감히…!" 하며 저자를 이단 취급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내용도 만만찮다.

삶을 이야기하면 교리가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본래 의미가 아닌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로 볼 때, 경건과 거룩을 따르면 축제와 즐거움을 잃는다. 형식을 강조하면 내용이 죽고, 내용을 앞세우면 경계가 무너진다. 신앙은 이렇게 양분되지 않지만 신앙을 규격화하는 사람들이 볼 때 박총은 교리가 부족하고 거룩하지 않으며 형식이 없어 내용을 담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의 삶을 바꾼 한 구절

▲ <내 삶을 바꾼 한 구절> / 박총 지음 / 포이에마 펴냄 / 380면 / 1만 3000원

책은 5부이다. 시든 꽃에 반하다(1부), 시시한 삶을 고르다(2부), 끝없이 패배하는 삶을 한없이 긍정하다(5부) 제목만 봐도 '창대하리라'와는 반대이다. 이기고 높아지고 성공하고 긍정하라는 세상에서 작고 하찮은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계획이 뒤집어지고 꿈이 깨지고 예상을 뛰어넘는 '뜻밖의 일'을 만나면 하나님께 맡기고 놓아드리라(35쪽) 한다. "대지는 / 꽃을 통해 / 웃는다(31쪽)"라고 말한 레이철 카슨을 인용하면서 개발과 발전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신비를 노래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목적을 이루어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다.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예수님이 찾아다닌 사람,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 나오는 사람과 동식물들, 예수님이 환대하신 사람들도 이러했다. 세상에 어울리지 않았고, 예수님도 미움을 받았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자를 보며 "순진하기는~"이라고 말할 것이다. 순진한 사람 한둘은 필요하지만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뜻으로 말한다. 나태를 사랑의 시초라 믿고, 게으름을 즐기며, 느림과 안식을 노래하며 뒤를 돌아보고 수풀을 뒤지며 살다가는 창대해질 수 없다. 하나님은 무얼 원하실까? 성경은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를 말하지 않는다. 재빠르게 기회를 잡아 성공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칭찬 목록에 없다.

저자가 인용한 구절은 성경과 기독교 서적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현대문학, 고전문학, 전기, 시, 인문, 사회과학을 넘나든다. 교육, 환경, 경제, 인권, 생태를 골고루 다룬다. 심지어 도덕경과 마호메트 평전, 틱낫한의 책을 말하고 천주교 사제들과 성인들이 여럿 나온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읽는 <꽃들에게 희망을>과 동화작가 <권정생>도 나온다. 아, 권정생 선생님이 나와서 얼마나 좋은지! 마틴 루터 킹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의 한 구절을 다시 읽어서 어찌나 좋은지! 동광원 이야기를 만나 반갑고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와 브레넌 메닝, 무함마드 유누스와 장 바니에를 만나 기쁘다.

그를 바꾼 구절에 우리도 감동받는다면

마이클 야코넬리는 은혜보다 교회 안의 사람들을 더 화나게 만드는 것도 없다(96쪽)고 했다. 은혜는 바리새인들이 오랫동안 쌓아 온 전통을 깨뜨렸다. 사회에서 밀어낸 고아와 과부를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호래자식 탕자를 받아주었고, 인간 말종 사마리아인을 선하게 만들었다. 저자는 우리가 은혜를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은 대상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창대하리라'에 빠지면 결과에 집착한다. "네 시작은 심히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앞에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청결하고 정직하면~(욥 8:5~6)"이라는 조건이 있는 줄 모른다. 발닷이 욥을 비난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것도 모른다. 사람과 맥락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서 믿으면 은혜가 사라진다. 축복은 '내가 열심히 간구한 결과'이고 '최선을 다해 긍정한 결과'가 되게 만든다. 그러면서 은혜를 잊는다. 저자는 그러지 말자고 말하는 구절들을 모아 제발 그러지 말자고 다시 한 번 외친다.

은혜는 위험하다. 은혜보다는 정해진 규칙과 명확한 경계가 편하다. 우리는 노력한 사람이 성공하고, 12시간 일한 사람이 1시간 일한 일꾼보다 임금을 더 받는 구조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하나님나라가 없다면 은혜 없이, 노력과 긍정을 앞세워 살면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다른 말씀을 하신다. 저자는 그런 구절을 찾아 우리에게 들려주며 함께, 천천히, 의를 행하며, 자신과 이웃을 돌아보며 살아가자고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의는 저자가 말한 대로 작고 하찮은 것과 더불어, 느리지만 함께, 정의와 공평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이다. 그를 바꾼 구절에 우리도 감동받는다면 세상이 교회와 함께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다만, 껄끄러운 점이 하나 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천주교는 반종교개혁을 하며 종교개혁가들을 죽였다. 신비주의를 끌어들여 종교개혁을 막았다고 한다. 아빌라의 테레사를 비롯한 관련 인물을 어떻게 봐야 할지 고민이다. (이 부분은 글쓴이가 식견이 부족해서 잘못 알았을 수도 있으니 양해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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