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기독교를 파시즘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게 참 서글프다. 어쩌다가 이 땅의 기독교가 이런 참담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한국 개신교는 독재로 점철된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에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1961~1970년에 412.4%, 1971~1977년에 56.7%, 1978~1985년에 29.7%, 1986~1991년에 23.9%가 성장했고 전 세계 50개 대형 교회 가운데 27개를 차지할 정도다. 그런데 이렇듯 폭발적으로 증가한 한국 개신교 신자가 2005년을 기점으로 감소하고 있다. 2005년 860만 명으로 1995년에 비해 1.4%나 줄었다. 한국전쟁 직후를 제외하고는 처음 겪는 마이너스 성장이다.

그러나 지금도 이 땅에는 수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있다. 교회의 양적 팽창에 안달을 떠는 목회자들 입장에서는 성장세가 둔화·감소되었다는 것이 몹시 걱정스럽겠지만, 냉정히 판단할 때 한국교회 위기의 본질은 질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안팎으로 심각한 '신뢰성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교회 내부적으로도, 건전한 상식과 이성을 가진 적지 않은 신자들과 목회자들이 한국교회를 지금 이 상태로 방치하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낀다. 세상에 문제를 안고 있지 않은 제도나 조직은 없겠지만, 한국교회는 사람으로 치면 '중병(重病)'에 걸렸다고 해야 할 만큼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그래서 교회 개혁의 절박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개혁을 위한 크고 작은 조직적 노력이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가시적 성과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이것은 지금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질병이 쉽게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종류의 질병이 아니라 만성적 고질병이요, 정확한 진단 자체가 어려운 질병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다시 말해, 한국교회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거듭나고 건강한 활력을 되찾으려면 섣부른 진단을 자제하고 좀 더 시간이 걸리고 고통스럽더라도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질병의 근본 원인을 세밀하게 파고드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독교를 파시즘과 관련해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바로 그런 자세의 일환이다. 한국교회의 고질병에 대한 올바른 진단은 여러 각도에서 종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기독교의 파시즘적 양태를 직시하고 그 뿌리를 파고들면 뒤엉킨 질병의 근본 원인들의 대략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나는 미국 기독교의 파시즘적 양태를 파헤친 두 권의 책을 번역했다. 하나는 베트남 전쟁 종군 사진작가이며 지금은 텍사스 주 오스틴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자유주의 목사 데이비슨 뢰어의 13편의 설교를 묶은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 - 다른 믿음과 생각을 부정하는 종교와 정치는 얼마나 위험한가>(샨티, 2007년), 다른 하나는 미국의 언론인·작가·종군기자로서 중앙아메리카, 중동, 아프리카, 발칸반도에서 20년 가까이 해외 특파원으로 일했던 크리스 해지스의 <지상의 위험한 천국 - 미국을 좀먹는 기독교 파시즘의 실체>(개마고원, 2012년)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책을 번역할 때는 종교의 파시즘 경향에 함축된 중대한 의미를 별로 심각하게 고민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그 의미를 철두철미 파헤치는 것이 향후 기독교의 사활과도 직결될 수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1. 정치 운동으로서의 파시즘(fascism)에 대한 개괄적 이해

이 운동은 1922~43년 이탈리아, 1933~45년 독일, 1939~75년 스페인 정계를 지배했으며, 그밖에도 여러 시대에 다른 몇몇 나라들을 지배했다. 일반적으로 모든 국가주의적 전체주의 운동이나 그런 정부를 가리킬 때 이 용어를 사용한다. 이탈리아어 '파시스모(fascismo)'는 라틴어 '파스케스(fasces)'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이 말은 고대 로마에서 권위의 상징이었던 도끼를 포함하여 느릅나무나 자작나무 가지의 묶음을 의미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1919년에 이탈리아 파시즘 운동의 표상으로 이 상징을 채택했다.

파시즘은 모든 형태에 있어서 주요한 특징들을 보여 주고 있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국가의 절대 우위이고, 다른 특징들은 모두 여기에서 유래한다. 개인의 뜻을 굽혀 국가가 명시한 대로 국민의 통합된 뜻에 따르고 국가를 상징하는 보통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것이 파시즘의 특징이다. 또한 군사적 가치관과 전투 및 정복을 찬양하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합리주의 및 부르주아적 가치관은 낮게 평가한다. 무솔리니가 로마제국의 '부활'을 예언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가나 민족을 신성한 것으로 받들고 그 운명을 선언하는 파시즘의 표현에는 대개 신비주의 요소가 짙게 배어 있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무능한 정부와 희망을 주지 못하는 지도자,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탈리아를 괴롭힌 혼란한 경제 상황에 대한 많은 국민의 환멸 속에서 자라났다. 이런 상황은 권위주의, 특히 군사적 덕목을 찬미하는 정치적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1922년 10월 28일. 무솔리니와 검은 셔츠를 입은 추종자들은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무력으로 정부를 무너뜨리겠다고 협박하면서 로마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국왕은 이에 굴복했고, 이튿날 무솔리니에게 정부 구성을 요청했다. 곧 무장한 파시스트 집단은 좌익 정당들의 본부를 습격하여 당원들을 폭행하기 시작했고,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이듬해 1월에 파시스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불법화하고, 그때부터 이탈리아를 전체주의국가로 다스렸다.

독일에서 일어난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나치) 운동은 이탈리아보다 훨씬 가혹한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 속에서 싹텄고, 더욱 강력한 반자유주의적 국가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히틀러의 계획은 많은 점에서 무솔리니와 달랐고, 특히 국가적·인종적 힘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훨씬 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특정한 정치적 견해에 대한 표현은 기본적으로 비슷했다. 스페인에서는 급진적 공화당 정권에 대항하는 내란이 끝난 뒤 팔랑헤당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이 파시스트 세력이 계속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중립을 유지함으로써 가능했고, 그에 따라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맛보았던 의회 의석 확보의 실패를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는 국민의 뜻과 주체성의 화신인 천황의 존재와 강한 군국주의 전통이 1930년대 파시즘 운동이 발전하는 데 필요한 요소를 제공해 주었다. 1930년대 일본의 많은 지식인은 서구화의 영향을 거부하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고유한 종교와 윤리 및 무사적 전통의 가치관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특별한 가치관의 전형으로서뿐만 아니라 미개한 민족을 정복하여 그 가치관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비준자로서의 임무가 세계 내에서 자신이 맡고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출처: 브리태니커

2. 미국이 파시즘 국가인 이유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 142~160쪽

기독교 근본주의는 미국 파시즘의 기둥이며, 이단을 배척하는 편협한 정통 신앙이 금권·제국주의와 손잡고 신정국가를 꿈꾼다고 고발하는 이 설교집에서, 자유주의 목사인 데이비슨 뢰어는 오늘날 미국은 민주주의가 "돈과 권력과 종교의 왜곡된 조작들로 인해 끝장"나고 파시스트 동맹이 지배하는 위험한 나라가 돼 가고 있다고 논평한다. 뢰어는 "선량한 사람들은 대부분 활동하지 않고 가만히 있도록, 심지어 잠에 빠져 있도록 길들여져" 왔고 그 결과가 파시즘 국가로의 이행이었다며 '너무 늦기 전에'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 행동하기를 고대한다.

파시즘 아래의 삶 - 데이비슨 뢰어 목사 설교(2004.11.7)

오늘날 미국이 처한 곳이 어디인지 진지하게 논의하는 자리에서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는 까닭을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내가 의도하는 바는, 미국이 빠져 있는 통치 형태가 가장 정확히 묘사하면 바로 파시즘이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는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의미들이 당연히 함축되어 있다는 점을 당신이 받아들였으면 하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인종 차별주의, 반유대주의를 떠올릴지 모른다. 사실,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나 비주류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 모두 파시즘의 일종이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경제적 차원의 파시즘이 있다. 1920~1930년대 유럽에서 '조합주의(corporatism)'로 알려진,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편 압제 정치의 요체 또한 바로 이것이었다. 이른바 조합주의는 1930년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채택되었고, 미국과 유럽에서 상당수 지식인과 정책 입안자가 하나의 모델로 제시한 바 있다.

미국의 <포천(Fortune)>지는 1934년 무솔리니를 커버스토리로 실었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을 깨뜨리고, 노동자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엄청난 액수의 돈을 땀 흘려 일한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그 돈을 통제하는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그의 파시즘적 능력을 찬양했다.

1930년대에 미국 파시즘을 가장 노골적으로 떠받든 사람 중 하나는 경제학자 로렌스 데니스(Lawrence Dennis)였다. 파시즘의 도래를 고대하고 환호한 그는 1936년에 쓴 책 <도래하는 미국의 파시즘(The Coming American Fascism)>에서, '18세기 미국 정신'의 수호자들은 틀림없이 '자기 동포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자유주의적 법률 규범이나 개인적 권리들에 대한 헌법 차원의 보장"이야말로 경제적 파시즘이 발전하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라며 한탄했다.

이렇게 경제 제도로서의 파시즘이 1920년대와 30년대에 널리 받아들여졌다는 점, 미국의 일부 강력한 산업주의자들한테는 거의 숭배의 대상이었다는 점을 우리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더군다나 파시즘은 항상 그리고 명백히 모든 종류의 자유주의(liberalism)에 반대해 왔다.

현대의 파시즘을 정의하는 데 일조한 무솔리니는 자유주의 사상을 적으로 간주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파시즘에서는 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따라서 개인의 삶을 용인하는 것도 개인의 이익이 국가와 일치하는 경우에 한정한다. 파시즘은 개인의 이름으로 국가를 부정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에 반대한다. 파시즘은 국가의 권리란 개인의 참된 본질에 대한 표현임을 재천명한다."

무솔리니는 정부가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파시즘의 본질은 정부가 국민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럼에도 '파시즘'이란 단어는 우리들 대부분에게 아주 낯설다. 우리는 파시즘이 무엇인지, 어떻게 파시즘을 알아볼 수 있는지 인식할 필요가 있다.

'파시즘이 뭐지?(Fascism Anyone?)'라는 좀 수줍어하는 듯한 제목의 글에서, 정치학자 로렌스 브리트(Lawrence Britt)박사는 파시즘 정권들에 공통된 사회적·정치적 의제를 밝히고 있다. 그는 히틀러, 무솔리니, 프랑코, 수하르토, 그리고 피노체트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파시즘을 식별케 하는 특징" 14가지를 들고 있다. 과연 낯익게 들리는지 보라.

1. 강력하고 지속적인 민족주의

파시즘 체제는 애국적인 모토, 슬로건, 상징, 노래 등의 장치를 끊임없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국기는 도처에서 휘날리는데, 심지어 의복이나 공공 시설물에도 상징으로 자주 등장한다.

2. 인권에 대한 경시

파시즘 체제는 특정한 경우엔 인권을 무시할 수 있다고 인민들을 설득한다. 동시에 '적'에 대한 공포와 안보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 체제의 인민들은 고문, 약식 처형, 암살, 장기 구금 등을 용인하는 경향이 있다.

3. 적과 희생양의 동일시

파시즘 체제는 특정 대상을 '위협' 또는 '적'이라고 부르면서, 이를 제거하기 위한 '애국적' 열정을 인민들 사이에 일으킨다. 그 대상은 인종적 소수자, 종교적 소수자,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테러리스트 등이다.

4. 군사 부문의 우위

파시즘 체제는 재정에서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몫을 군사 부문에 투자한다. 광범위한 문제점이 있더라도 국내 부문은 무시한다. 군인과 병역의무는 이상화된다.

5. 성차별주의의 만연

파시즘 체제는 배타적인 남성 지배 국가로 가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 성 역할이 매우 엄격하게 강조된다. 사회적으로는 낙태 반대, 동성애 혐오 분위기가 높아지고 이에 따른 입법도 이루어진다.

6. 대중매체의 통제

파시즘 정부는 언론을 직접 통제하거나 혹은 규제나 어용 대리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제한다. 검열은 매우 일상적인(특히 전시에) 일이다.

7. 국가 안보라는 강박관념

파시즘 체제는 공포를 대중에게 (파시즘에 적합한 대중운동의) 동기를 유발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8. 종교와 정부의 얽힘

파시즘 정부는 그 국가에서 가장 대중적인 종교를 여론 조작의 도구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정부 지도자들은 일상적으로 종교적 수사와 용어를 내뱉는다. 심지어 해당 종교의 주요 교리가 그 정부의 정책에 완전히 반대될 때도 그렇다.

9. 기업의 권력에 대한 보호

파시즘 국가에서는 산업과 기업에 '귀족 과두 집단'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 기업의 '파워 엘리트'들과 정부의 '파워 엘리트'들은 서로 돕는다. 이 같은 협력 관계는 해당 정부의 (파시즘적) 지도자들이 권력을 잡게 한 요소이기도 하다.

10. 노동자들에 대한 억압

파시즘 정부를 거의 유일하게 실질적으로 위협하게 되는 것은 노동자들의 조직된 힘이다. 그래서 파시즘 체제에서 노조는 완전히 제거되거나 가혹하게 탄압 당한다.

11. 지식인들과 예술에 대한 경멸

파시즘 국가는 고등교육과 학문에 대한 노골적 적대감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교수와 학자들이 검열되거나 체포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예술의 자유로운 표현이 공공연하게 공격받는다. 정부는 예술 부문에 대한 재정 투자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12. 범죄와 처벌의 강박관념

파시스트 체제에서 경찰은 거의 무제한적인 권력을 누린다. 인민들은 경찰의 권력 남용을 못 본 체하거나 심지어 애국주의의 이름 아래 시민의 자유를 포기하기도 한다.

13. 족벌주의와 부패의 만연

파시스트 체제는 한 무리의 친구들과 모임들에 의해 통치된다. 이들은 서로를 정부 요직에 임명하고 정부 권력으로 친구들을 보호한다. 그래서 파시스트 체제에서는 국부(國富)가 정부 지도자들에 의해 유용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14. 부정 선거

파시스트 국가의 선거는 가끔 완전한 사기다. 혹은 상대방 후보를 터무니없이 모함하는 선거운동이나 암살에 따라 선거 결과가 조작되기도 한다. 부정 선거를 위해 투표자 수나 선거구가 조작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파시즘 체제는 선거를 조작하거나 통제하기 위해 사법부를 악용한다.

정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이 목록이 낯익을 것이다. 물론 종교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익숙할 게 틀림없다. 이 목록의 상당수가 전 세계 종교 근본주의들의 사회적·정치적 의제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본주의를 종교적 파시즘으로, 파시즘을 정치적 근본주의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유용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파시즘과 미국이 이렇게 처음 만난 것은 아니다. 1944년 초, <뉴욕타임스>는 헨리 월리스 부통령에게 "다음의 질문에 답변하는 글을 써주십시오. 어떤 사람이 파시스트입니까? 미국에 얼마나 많은 파시스트가 있습니까? 그들이 얼마나 위험합니까?"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한 월리스의 답변은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에 이른 1944년 4월 9일자 <뉴욕타임스>에 발표되었다. 이 진술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이 적용되는지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월리스는 이렇게 썼다. "정말로 위험한 미국의 파시스트는… 히틀러가 독일에서 독일 방식으로 했던 것을 미국에서 미국 방식으로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미국의 파시스트는 폭력을 선호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공적인 정보 전달 경로를 오염시키는 방법을 쓸 것이다. 파시스트에게 문제는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진리를 가장 잘 제시하느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뉴스를 가장 잘 활용해 대중을 속이고 파시스트 및 그들 집단이 더 많은 돈과 권력을 가져가느냐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발흥하는 파시즘 추세를 아주 강력히 고발하면서 월리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뛰어난 애국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헌법에 보장된 모든 자유를 파괴하고 말 것이다. 그들은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요구하지만 실은 독점과 기득권을 대변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온갖 속임수를 동원해 이루고자 하는 최종 목적은 정치권력 장악이며, 국가권력과 시장 권력을 동시에 사용해 일반 시민을 영구히 자신들에게 복종시키려는 것이다."

이 기준들에 따를 때 일반 시민을 영구히 복종시키기 위해 오늘날 사용되는 몇 가지 무기의 예로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교도소 체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세계무역기구(WTO), 노동조합 파괴, 최고 경영 책임자의 보수는 늘리고 노동자에 돌아갈 몫은 삭감하기, 노동자 연금 폐지, 약탈적인 신용카드 이자율, 그리고 일자리 아웃소싱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미국의 파시즘화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연구와 비판을 해 온 사람으로 마이클 루퍼트(Michael C. Ruppert)라는 저널리스트가 있다. 그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관련해 네 가지 충고를 하는데, 모두 돈과 관련된다.

첫째, 채무에서 벗어나라.

둘째, 당신에게 힘을 주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들에 돈과 시간을 써라.

셋째, 당신에게 거짓말을 일삼고 당신의 화를 돋우며 당신을 녹초로 만드는 큰 은행들, 뉴스 매체들, 기업들을 위해 단 한 푼도 쓰지 마라.

넷째, 돈이 어떻게 효과를 발휘하는지 배우고, 돈을 정치적 무기처럼 사용하라.

이 충고가 쓰인 것은 최근이다. 또 다른 충고 하나는 60년 전 루즈벨트 정권의 부통령인 헨리 월리스가 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는, 파시즘을 내부적으로 궤멸시키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완전 고용하는 동시에 예산 균형을 맞추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돈보다 사람을 우선시해야 한다. 폭력과 기만이 아니라 이성과 고상함에 호소해야 한다. 우리는 압제적인 정부 혹은 독점과 카르텔의 형태를 띤 산업상의 소수 독재 정치를 묵인해서는 안 된다."

3. 파시즘으로 치닫는 미국 기독교 - <지상의 위험한 천국>, 27~65쪽

움베르트 에코의 '영원한 파시즘: 파시즘을 식별하는 14가지 방법'을 길게 인용하는 걸로 시작하여, 보수적 기독교 우파가 미국 사회 전반과 대부분 선량한 수많은 신자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이 책에서, 저자는 고집불통 신앙, 동성애 혐오, 광신(狂信), 매우 반기독교적 이데올로기를 보여 주는 사례들을 제시하고, 기독교 우파 교회와 모임들에 직접 참여하여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실감나게 보고하며, 낙태 반대 집회와 1주일에 걸친 회심(개종) 기술 학습에 대한 취재를 진행한다. 저자는 그렇게 기독교 우파의 활동 속으로 파고들면서 그들의 기원과 추동 동기, 음흉한 이데올로기적 기초들을 분석하고, 초기 파시스트 운동들과 닮은 구석이 많은 기독교 우파의 종교적 정당성에 정면 도전한다.

파시즘으로 향하는 기독교

주권운동(dominionism)으로 알려진 급진적 기독교 운동으로 말미암아 민주적 가치들이 슬며시 해체되고 있다. 이 운동은 기독교 신앙과 미국적 애국심의 망토 속에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고 있다. 주권운동이라는 명칭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dominion)'을 주는 창세기 1:26~31에서 유래한다. 숫자는 적지만 영향력 있는 이 운동은 전통적 복음주의에서 벗어나 있다. 주권 운동가들은 오늘날 최소한도 여섯 개의 전국 텔레비전 방송망을 통제하는데, 이 각각이 수천만 가정들과 미국 남침례교 같은 교파를 포함한 2000개 이상의 라디오 종교 방송국에 송신되고 있다. 주권운동은 급진적 교회가 권력을 장악할 것을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에 맞추기 위해 전통적인 민주적·기독교적 용어와 개념들을 재정의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고전적 파시스트 운동들과 여러 두드러진 측면을 공유한다. 학자인 로버트 O. 팩스턴은 파시즘을 "공동체의 쇠퇴, 굴욕, 혹은 희생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 그리고 이를 보상하는 통일성, 힘, 순결의 문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 정치 행동의 한 형태"로 간주한다.

기독교 재건주의로 알려진 이데올로기에서 탄생한 주권운동은 신앙을 정치화하려고 애쓴다. 모든 파시스트 운동들처럼 그것은 지도력을 숭배하고, 지배적 인종, 즉 이 경우에는 미국 기독교인들의 도덕적·신체적 우월함을 강하게 주장하며, 마법과 신비를 믿고 있다.

급진적 칼뱅주의를 뿌리로 하는 신정론적 종파인 주권운동은 존 칼뱅이 1500년대에 스위스 제네바에 주입했던 신정(神政, theocracy)을 정치적 모델로 삼는데, 하나님이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도록 명하셨다고 가르친다. 1925년의 스콥스 재판(진화론 교육 금지 법안을 어기고 진화론을 가르친 테네시 주의 교사 스콥스에 대한 재판, 종교와 정치의 충돌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이다-역자 주) 이후 미국의 대다수 근본주의자들이 수십 년 동안 고수한 일체의 정치 참여에 대한 거부는, 미국을 그리고 종국에는 지구 자체를 기독교인이 '지배'해야 한다는 요청으로 대체되었다. 이전에는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기다려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반면, 주권운동에서는 예수가 기독교인들에게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도록 요구했다고 설교한다. 이 호전적 성경엄수주의(biblicism)에서, 미국은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고, 미국 기독교인 지도자들의 모든 정치적·지적 적수들은 아주 간단히 사탄의 대리인으로 간주된다. 기독교인의 지배 아래, 미국은 더 이상 죄 많고 타락한 나라가 아니라, 십계명이 우리의 법률제도의 기초를 형성하고, 창조론과 '기독교적 가치들'이 우리의 교육제도의 기초를 형성하고, 그리고 미디어와 정부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노동조합들, 인권 법들, 공립학교들은 폐지될 것이다. 여자들은 집안에 머물기 위해 노동력에서 제거되고, 기독교적으로 불충분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사람에게는 시민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목소리는 기독교인의 목소리이고, 모든 다른 사람들은 침묵을 강요당하게 될 것이다.

억압적인 기독교 국가

오늘날 기독교 재건주의의 지적 대부들의 인종차별적이고 잔인한 불관용은 억압을 시행하려는 그 운동의 강렬한 욕망을 오싹하게 상기시켜 준다. R.J. 러쉬두니가 1973년에 쓴 <성경적 법의 원리들>(The Institute of Biblical Law)은 주권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다. 러쉬두니는 가혹하고 용서 없고 폭력적인 기독교적 사회를 요구한다. 그의 저작은 칼뱅이 1536년에 맨 처음 발표했으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저작들 중 하나인 <기독교 강요>에서 설계한 억압적 신정(神政) 사회에 많이 의존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선민으로서 아담과 이브가 하지 못한 일을 행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러쉬두니는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기독교 국가를 창조하는 일이다. 이 믿음 체계에 따르면, 히브리 성경에서 하나님의 명령 이행을 소홀히 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여 기독교인들로 대체되었다. 성폭행, 유괴, 살인 같은 범죄들뿐만 아니라 간통, 신성모독, 동성애, 점성술, 근친상간, 부모 구타, 상습적인 청소년 범죄, 그리고 여성들의 경우에는 '혼전 부정(不貞)'도 사형에 처해야 한다. 세상은 기독교적 미국에 정복되고 지배받아야 한다. 러쉬두니는 나치의 대학살로 유대인 600만 명이 살해당했다고 널리 인정되는 사실을 숫자가 과장된 것이라고 간단히 치부했는데, 인종에 관한 그의 이론들은 더욱 우월한 형태의 인간과 더욱 열등한 형태의 인간이 존재하는 나치의 우생학 이론들과 종종 공명한다. 기독교 국가에 의해 비도덕적이고 교정 불가능하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은 몰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러쉬두니는 연방정부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그는 연방정부가 국가 방위 정도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교육과 사회복지는 교회들에 넘겨주어야 한다. 성경의 법이 세속적 법전을 대체해야 한다. 프란시스 쉐퍼와 팻 로버트슨 같은 후대의 제자들에 의해 주류(主流)의 입맛에 더 맞는 것이 된 이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주권운동의 핵심에 있다. 그것의 교의들 중의 많은 것이 종교 기반 커뮤니티 협의 기구를 통해 법률로 제정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약물과 임신 클리닉 운영에서부터 오직 순결만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을 학교에서 실행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행하는 수많은 기독교 자선 단체들뿐만 아니라 미 전국생명권 위원회와 팻 로버트슨의 축복작전 같은 단체들에 연방정부 기금에서 수십 억 달러를 흘려보내고 있다.

주권운동가들과 그들의 부유한 우익 후원자들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낯익고 위안을 주는 용어와 구절들로 말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은 과거에 그 단어들이 의미했던 것이 더 이상 아니다. 그들은 '로고사이드(logocide)', 즉 단어를 죽이는 느린 과정에 참여한다. 단어에 대한 낡은 정의는 새로운 정의로 대체된다. 낡은 믿음 체계의 코드명은 해체되어 정반대의 의미를 띠게 된다. '진리', '지혜', '죽음', '자유', '생명', '사랑' 같은 단어들은 세속적 세상 속에서 그 단어들이 의미하던 것을 더 이상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과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과 그리스도를 향한 죽음을 의미하며, 그리고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나 불신앙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는 거의 무관하게 믿음 체계에 대한 헌신과 순종의 수준을 가리킨다. '자유(liberty)'는 자유(freedom)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에게 순종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해방될 때 발견되는 자유이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치명적으로 왜곡된 단어는 '사랑'인데, 그 단어는 자신들의 고립과 소외에 맞서 사랑이 넘치는 따뜻한 공동체를 추구하는 많은 사람을 주권운동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사용된다. '사랑'은 왜곡되어 영원한 생명의 약속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절대 복종을 의미한다. 상대방을 용납하는 맹목적인 인간적 사랑은 위험하고 신뢰할 수 없는 열등한 사랑으로서 공격을 받는다.

"목표는 오직 그 안에서만 참된 자유가 있는 하나님의 법질서(law-order)여야 한다"고 러쉬두니는 <성경적 법의 원리들>에서 썼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물든 안토닌 스칼리아 같은 일부 연방 대법원 판사들을 통해 그 과정에 탄력이 붙을 때, 미국은 새로운 언어를 말하기 시작한다. 종교적·정치적 술어의 느리면서도 냉혹한 강탈이 존재한다. '자유(liberty)'와 '자'(freedom)' 같은 용어들은 과거에 그것들이 의미했던 것을 더 이상 의미하지 않는다. 주권운동 속의 사람들도 '자유'에 관해 말하기는 하지만 미국의 전통적 자유 개념들-남들과 다른 의견을 표현하고 믿음과 존재의 다른 방식을 존중하는 자유, 그들 자신의 목표와 행복의 형태를 추구할 개인들의 자유-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 우파가 사용하는 '자유'라는 용어는 매우 좁게 생각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받아들임이 촉진하는 이분법적 세계관과 더불어 오는 자유이다.

오염된 언어, 오염된 사회

마크 A. 빌라일즈와 스티븐 K. 맥도웰이 1989년에 출판한 <미국의 섭리적 역사>(America's Providential History)는 많은 기독교 학교에서 사용되는 미국사 표준 교과서이며 또한 자택 학습 운동의 한 주요 요소이다. 이 책에서, 저자인 빌라일즈와 맥도웰은 '자유(liberty)'라는 용어를 '주님의 성령'에 대한 충성으로 정의한다. '자유'의 과업은 한 사회를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이 강요한 종살이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지속적 과정, 즉 기독교인들에 의해 시작되는 과정이다. 단일하고 획일적이고 의문시되지 않는 '기독교적' 지향을 도입하기 위해, 이 과정은 상이한 도덕규범과 믿음 체계를 제거하거나 박멸한다.

'모든 지파와 언어와 나라'에게 '예수의 이름'을 전하려 애쓰는 선교 단체인 글로벌 리코딩스 네트워크(Global Recordings Network)는 그들의 가르침에서 '자유(liberty)'의 의미에 세밀한 주의를 기울인다. 한 전도용 테이프를 틀면 이런 말이 흘러나온다: "나는 이 '자유'라는 단어를 당신에게 이해시키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땅에는 충분한 자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주님의 성령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하는 대로 행하는가? 그들은 진리를 말하는가? 그들은 간음과 간통으로부터 달아나는가?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죽이고,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 아니라 사탄의 영의 일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된 자유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주님의 성령'을 사회 속으로 '주입시키는 것'은 주님의 성령을 사회의 법률제도 속으로 주입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자유는 미국이 기독교적 법률에 복종하는 정도로서 정의된다. 미국이 기독교 국가가 될 때, 자유는 이 견해에서는 사탄으로부터의 해방이 된다. 이 느리지만 서서히 대개 감지할 수도 없게 사고를 질식시키는 과정, 즉 민주적 개념과 생각의 변질은, 새로운 전체주의적 비전이 낡은 어휘들로 분명히 표현될 때까지 사회를 오염시킨다. 이 언어의 야만적 살육은 미묘하고 은밀하게 일어난다.

급진적 기독교 운동 지도자들은 전통적 정의(justice)에 대해 말로는 찬양을 아끼지 않지만, 자신들끼리는 스스로 '기독교의 원리들(Christian principles)'이라고 정의하는 것을 촉진하는 법률제도를 요구한다. 따라서 운동의 지도자들이 '무신론자들', '불신자들', 혹은 '세속적 인본주의자들'로서 간단히 치부하고 있는 모든 적수들을 비난하여 도덕적·법률적으로 격하시킬 때에도, 외관상 법과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을 유지할 수 있다. 이 로고사이드의 과정 아래에서, 정의는 불의를 실행하는 것으로 곡해되고 법과 질서의 신기루가 된다. 도덕적 계산법은 더 이상 보편적 인권을 주요 테마로 다루지 않는다. 이제 그것의 중심은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의 행복과 보호를 증진하는 것이다. 로고사이드는 사회의 총체적 부분을 도덕적 지도(map)에서 천천히 그리고 은밀히 제거한다. 나치 독일의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가 썼듯이, "최선의 선전은 말하자면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것, 즉 선전자의 주도권이 대중이 전혀 모르는 채로 삶 전체에 스며드는 것이다."

1935년 유대인 조상 때문에 드레스덴대학 로망스어 교수 직책에서 해임된 빅토르 클렘페러는 나치즘에 대한 최초의 문학비평이라 할 만한 것을 썼다. 그는 나치는 또한 "가치들, 단어들의 빈도수를 바꿔 놓았고, 이전에는 개인들이나 작은 소매치기 일당이 사용하던 단어들을 공유 재산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나치당을 위해 단어들을 몰수하고 단어와 구절과 문장 형태에 그들의 독이 흠뻑 스며들게 했다. 그들은 언어가 그들의 무시무시한 체제를 섬기게 했다. 그들은 단어를 정복했고, 그것들을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그리고 가장 유력한 선전 도구로 만들었다"고 그는 특별히 언급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대다수 독일인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그는 지적한다.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미국에는 20만 개 이상의 복음주의 교회에 출석하는 최소한도 7000만 명 이상의 복음주의자들이 있는데, 전체 인구의 약 25퍼센트에 달한다. 응답자들 중 약 40퍼센트는 성경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말씀'이며 "한 말씀 한 말씀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다는 것을 여론조사는 보여 준다. 이 비율을 미국 전체 인구에 적용해 보면, 이런 사람들은 약 1억 명이 된다. 이 여론조사들은 또한 미국인의 약 84퍼센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응답자의 80퍼센트는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며, 자신들이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40퍼센트는 천사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모든 응답자의 거의 3분의 1은 휴거(예수가 세상에 다시 올 때 기독교인들이 공중에 올라가 예수를 만나는 일)를 믿는다고 말한다.

미국의 많은 기독교인은 성경의 축자적 해석을 받아들이는 반면, 더욱더 어두운 불관용적·신정론적 미국의 비전에 흡족해하는 것은 기독교 주권운동가들을 포함하는 극소수뿐이다. 불행하게도, 미국 국가와 종교 제도들의 조직을 떠맡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소수다.

2004년의 한 연구에서, 정치학자인 존 그린은 자신이 '전통적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식별한다. 그린이 전체 인구의 12.6퍼센트로 추정하는 이 집단은 "미디어에서 널리 논의되는 '종교적 우파'에 가장 가까이" 간다. 이 집단은 압도적으로 공화당원인데, 민주적 다원주의에 공공연히 적대적이고, 동성애자들에게 다른 미국인들과 똑같은 권리를 부여하기를 거부하며, 그리고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기 위한 헌법 수정 같은 전체주의적 정책들을 옹호한다. 그린이 말한 '전통적 복음주의자들'은 아마도 진짜 주권운동가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호전적인 핵심 집단이 그린이 주장하는 것보다 더 적을지도 모른다는 표지들이 있는데, 조지 바나가 실시한 것과 같은 다른 여론조사들에서는 전체 인구의 약 7퍼센트로 조금 감소한다. 그러나 이 급진적 운동의 잠재적 영향력은 그것의 숫자를 능가한다.

집단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신자들 사이에서도 무수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대중운동을 폭넓게 상술하고 이 갈등들을 상술하기는 어렵다. 초대형 교회들에는, 오로지 번영의 복음에만 집중하는, 즉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이 부유하고 성공적이기를 원한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정치에는 거의 무관심한 예배자들과 설교자들이 있다. 방언으로 말하는 카리스마파 신자를 사탄의 숭배자로 간주하는 엄격한 근본주의자들이 있다. 짐 월리스의 소저너 무브먼트(Sojourner movement)와 론 사이더의 '사회참여를 위한 복음주의 운동' 같은, 성경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도 사회적 행동주의와 좌파 정치를 받아들이는 좌파 복음주의자들의 작은 무리들이 있다. 하나님의 군대가 미국 역사의 경로를 바꾸기 위해 행할 수 있는 것보다는, 기독교인으로서 자신들의 공동체 속에서 행할 수 있는 것에 더 집중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기독교인들에게 정치에서 손을 떼고 예수와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영적·도덕적 갱신에 집중하라고 말하는 루이스 팔라우 같은 고리타분한 복음주의자들이 있다.

그러나 갈라지고 다루기 어렵고 다양한 집단들로 이루어진 이 큰 덩어리 내부에는 많은 사람을 이 교회들 속으로 몰아넣는 절망, 고립, 단절, 그리고 절망에 천착해 온 강력한 기독교 주권운동가들의 핵심 집단이 있다. 주권운동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정치적 의제를 조장하기 위해 이 불만족들을 이용해 왔다. 그들이 복음주의 교회 내부 모두의 적극적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종종 복음주의 교인들의 동정을 받는다. 이 기독교인들 다수가 주권운동의 맹렬한 유토피아적 환상, 광신주의, 혹은 냉혹함을 완전히 공유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주권운동 지도자들은 거대한 숫자의 기독교인들의 소극적 지지에 의존할 수 있다. 그 운동의 호소력은 그 급진주의자들이 설교하는 높은 이상, 어떤 도덕적·기독교적 국가의 약속, 거듭남의 약속에 있다. 불신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억압을 요구하는 것에서 나타나는 그 운동의 더욱 어두운 목적들, 즉 빈번한 사형 집행, 성폭행과 근친상간의 경우에까지 적용되는 낙태 불법화, 그리고 공교육 해체가 성취된다면, 그 운동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을 소외시킬 것이다. 그러나 훈련되고 자금 조달을 잘하는 급진적 핵심 집단과, 불만을 품고 걱정하며, 활력 있는 막연한 '기독교 국가'를 갈망하는 수천만 미국인들의 이 결합은 미국 정치에서 잠재력을 지닌 새로운 세력이다. 정치제도 형태를 바꾸는 데로 나아가기 위해, 주권운동가들은 재정적, 사회적 혹은 정치적 위기, 즉 경제가 완전 붕괴하는 대격변의 순간, 혹은 미국 본토에 대한 또 다른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기다릴 뿐이다. 그러한 위기는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과감한 새 국가 안전 보장 조치와 가혹한 개혁들에 대한 일반 대중의 강력한 요구를 낳을 수 있다. 미국에서 신정(神政), 즉 기독교적 파시즘을 확립하기 위해, 이 급진주의자들은 주권운동가들과 그들의 동조자들이 불을 지피고 조작하는 광범위한 불만족과 두려움을, 국회와 법정에서 포위 공격을 받는 온건주의자들, 즉 파산하고 평판이 나빠진 자유주의를 고수하는 사람들의 반대를 일축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자본과 국가권력과 결탁한 교회

주권운동은 무자비하고 고삐 풀린 자본주의를 신성시해 왔다. <하퍼스 매거진>에 실린 '불순종의 영: 저항으로의 초대」(The Spirit of Disobedience: An Invitation to Resistance)'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커티스 화이트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기독교나 계몽주의가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적 가치들은 그리스도의 비전과 칸트의 계몽주의 윤리와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번영의 복음은 예수가 우리 모두가 부유하고 성공적이기 바라며, 정부가 방해하지 않도록 비키기를 원한다고 설교하면서 '아메리카 주식회사'(corporate America)를 기쁘게 하는 믿음 체계를 공식화해 왔다. 예컨대 거의 모두 복음주의자나 근본주의자인 128명의 파트타임 목사를 미국 전역의 78개 공장에 배치한 타이슨 푸드 같은 회사를 비롯해 퍼듀, 월마트, 샘즈클럽 등은 그 운동의 거대한 재정적 후원자로 기여하고 있다.

"우리의 문화는 합리적 자유주의와 기독교 보수주의자들 둘 모두가 지지하는 율법주의(legality)에서 죽음이 피난처를 구해 온 문화"라고 화이트는 결론짓는다. 이 '율법주의'는 최저생활 임금보다 적은 임금을 지급하면서 적절한 의료와 은퇴 계획들은 제공하지 않는, 노동자들에 대한 조직적 착취를 그저 '우리 자유의 유산의 일부'로 만든다. 화이트는 우리의 민족주의적 승리주의, 그리고 '자유를 보호하고 추구하는' 과정에서 전 세계가 지금까지 알아온 우리의 '가장 광신적으로 파괴적인 군사력' 분출을 격렬히 비난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는 이런 문화의 결과로 생기는 질병으로 '비디오게임과 할리우드 영화의 괴상한 폭력', '생명을 효율성과 편리함의 저급한 논리에 종속시키는, 인간 생명에 대한 태도를 이따금 감추는 낙태의 율법주의', 무의미한 노동, 생각 없는 소비주의, 왜곡된 시간관념, 집은 '관(棺, coffin)'이고 이웃 지역은 '공동묘지' 같은 느낌이 드는 주택 개발, 그리고 "아마도 가장 파괴적으로는, 우리가 자연 그 자체에 전멸을 선고하는 것까지도 사유재산을 추구할 자유라고 부르는 소유의 율법주의"를 열거한다.

급진적 기독교 우파 내부의 막후 인물들은 사회 주변으로부터 기업 임원, 하원·상원 의사당과 입법부로 이미 옮겨 갔다. 그 운동은 공화당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해 왔다. 기독교인 근본주의자들은 오늘날 모든 공화당 주(州) 위원회에서 36퍼센트를 차지하고 있거나, 혹은 50개 주 가운데 18개 주에서 다수 의석을 가지고 있고 나머지 주에서도 상당한 세력을 지닌 소수파다. 45퍼센트의 상원의원과 186명의 하원의원이 가장 영향력 있는 세 개의 기독교 우파 지지 단체들로부터 80에서 100퍼센트에 이르는 지지율을 얻었다. 기독교인연합, 독수리포럼, 그리고 가정자원협의회(Family Resource Council)가 그 단체들이다. 2004년 대통령 선거일 출구 조사에서 투표자의 23퍼센트는 자신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으로서 투표했음을 밝혔다. 부시는 그들 중 78퍼센트의 표를 얻었다. 다수의 투표자들은 선거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도덕적 가치들'이었다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는 납세자의 세금 수십 억 달러를 세속적인 단체와 정부의 사회복지 사업 단체로부터 미국의 민주주의를 해체하고 신정국가를 만들려고 애쓰는 신앙에 기초한 단체들, 돈다발을 가지고 있는 교회와 단체들에게로 꾸준히 돌려왔다. 2005 회계연도에, 연방정부는 21억 5천만 달러 이상을 종교 기반 단체들에 주었는데, 이것은 연방정부의 모든 경쟁적인 서비스 보조금의 11퍼센트였다. 종교 기반 단체들은 시종일관 연방정부의 사회복지 사업 자금에서 날로 더 많은 부분을 얻고 있는데, 만일 이런 경향이 계속되면 엄청난 사회적·정치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기독교 우파와 급진적 이슬람교도들은 성전(聖戰)에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서로를 반영한다. 똑같은 강박관념을 공유한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형태의 신앙이나 불신앙을 너그럽게 묵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술적·문화적 표현과 싸우는 중이고, 미디어를 침묵시키려 애쓰고, 여성들의 복종을 요구하고, 엄격한 성적 억압을 촉진하며, 그리고 그들 자신을 폭력을 통해 표현하려고 애쓴다.

자기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

주권운동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증오와 편견을 만족시키는 닫힌 체계들의 정보와 주입 속에 갇혀 있다. 수천만 미국인이 시청하는 뉴스, 건강, 오락, 신앙 프로그램이 오로지 기독교 방송국들에 의존한다. 이 추종자들은 잘 통솔되고 강력한 투표 진영들로 조직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종교적, 오락 시간의 거의 모두를 요구하는 교회들에 출석하는데, 이 교회들은 선거 시즌에는 공화당을 위한 지역 사령부와 마찬가지 기능을 한다. 이 신자들은 외부 영향을 받지 않는 폐쇄적이고 신비한 세계 속에 갇혀 있다. 의문이나 반대 의견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의 모두 복음주의자들인데 오늘날 110만에서 210만 명에 달하는 그들의 자녀들은 자택 학습을 하고 있다. 이 아이들은 자신들의 성경적 세계관과 모순되는 생각이나 연구의 도전을 받지 않는다. 진화는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을 6일 만에 창조하셨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로 창설되었는데,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은 그 기독교 국가를 멸망시키려 애쓰고 있다. 이 젊은 남녀들은 제리 폴웰의 리버티 대학, 팻 로버트슨의 리젠트 대학, 그리고 패트릭 헨리 대학과 그 밖의 다수의 기독교 대학들로 종종 몰려든다. 요약하면, 그들은 순종하도록 배운다. 그들은 비판적 분석, 의문, 독립적 사고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자라난 그들은 개방적 다원주의 사회를 파멸시키려는 의도를 품은 수많은 신화들을 믿는다.

미국의 대다수 근본주의·복음주의 교회들은 이 비현실에 기초한 믿음 체계를 퍼뜨리는 목사들이 이끈다. 그들은 신비한 마법, 새로운 활력이 필요한 '기독교 국가'라는 허구, 그리고 어둡고 무시무시한 종말론적 환상을 받아들인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 가져온 환상들을 묘사하면서, 그들은 다가오는 세계 전쟁에 관해 설교한다. 역사의 끝에는 기독교인들이 지구를 지배할 것이고, 충분히 기독교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불신자들은 고통과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질 것이라고 그들은 설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원수로 규정해 온 모든 문화, 나라, 종교들의 멸망을 요구한다.

미국 역사와 근본주의 운동 그 자체가 변화되었듯이, 근본주의의 증오의 대상도 달라졌다. 수십 년 전에는, 신자들은 시민권 운동, 반전(反戰) 운동, 미국시민자유연맹 같은 자유주의 단체들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인종 차별주의자들인 그들은 미국 흑인, 유대인, 가톨릭교도를 용납하지 않았다. 오늘날 공산주의에 맞선 싸움은 형태가 바뀌었다. 사탄의 자리는 더 이상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에 있지 않다. '세속적 인본주의'로 불리는 어떤 경쟁 종교를 촉진하는 개인과 제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사탄의 대리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공립학교 위원회와 미디어 배후에 숨어 있다는 가공의 적들에 야만적 음모론과 편집증이 자극을 받고 있다. 이 가공의 적들은 신자들을 계속해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 그들이 언제든 그 운동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억압적 조치를 지지하게끔 고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도록 만든다.

군대에 침투한 기독교 근본주의

주권운동을 특징짓는 것은 음모론, 마법, 성적 억압, 편집증,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 그리고 종말론적 폭력과 군사력에 홀림이다. 그것의 바깥 언저리에는, 기묘한 메시아적 용사들, 즉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용사들의 무리가 있다. 그것은 그 운동 바깥의 모든 사람을 적들로 바꿔놓는다. 크리스천 아이덴티티 같은 일련의 불분명하고 실체 없는 준(準)군사 단체들이 있는데, 그 단체 회원들은 그 운동의 수사학에 영향을 받아 대담해져서, 자신들이 어느 날 종교 전쟁을 치르게 되리라고 믿는다. 성전(聖戰)에 대한 이 믿음에 불을 지피는 군사 지도자들은 명사 대우를 받는다. 미국 군대를 소말리아의 한 군사 지도자에 맞선 싸움으로 이끈 후, 윌리엄 보이킨 장군은 선언했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군대보다 더 크다는 것, 나의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고 그의 하나님은 우상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보이킨 장군은 페이스 포스 멀리플라이어(Faith Force Multiplier)라는 작은 단체 소속인데, 그 단체 회원들은 용사들을 '영혼을 위한 영적 전쟁으로' 소집하는 선언서에서 군사적 원칙들을 복음 전도에 적용한다. 보이킨은 자신의 선동적 수사로 징계를 당하기는커녕 미국 국방정보부 차관보로 진급했다. 그는 미국은 사탄과 싸우는 '기독교 국가'로서 성전에 참가하고 있고, 미국의 이슬람교 반대자들은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맞서기만 하면" 패배할 거라고 믿는다.

기독교 우파는 미국 최초의 현대적 용병 군대 창설에 깊이 개입되어 있다. 이라크에서 무서운 용병 부대를 창설한 사설 경비 회사인 블랙워터(Blackwater) 창업자인 에릭 프린스는 베일에 싸인 백만장자이며 우파 기독교인이다. 그는 자기 회사가 미국 군대의 애국적 확장이라며 옹호한다. 부정직한 것만큼이나 냉소적인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의 종업원들은 헌법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한다. 공식적인 숫자는 전혀 없고 일부 추정치는 훨씬 더 높지만, 이라크에서 일하고 있는 무장 경비 청부업자들(contractors)은 2~3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다국적군의 일부로 계산되지 않는다.

기독교 우파의 종말론적 수사학에서 권능을 부여받는 이 용병 부대의 창설은 근위병을 만들어내고 있다. 고대 로마의 근위병은 법적 제약들을 무시하고 폭력을 정치의 일부로 만들고 결국은 로마제국을 전제정치와 폭정 속으로 몰아넣은 준(準)군사 세력이었다. 독재 운동은 법의 바깥에서 작용하는 준(準)군사 세력, 즉 잠재적 적수들 사이에 두려움의 씨를 뿌리고 반역자로 낙인찍힌 자들을 침묵시키는 세력을 필요로 한다. 이라크에서 블랙워터 같은 용병 부대는 이미 민법과 군법을 넘어 활동한다. 그들은 이라크에 있는 모든 민간인 청부업자들을 박해로부터 면제시키는, 이라크의 미 점령 당국이 통과시킨 2004 포고령의 보호를 받는다.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기독교적 미국'을 건설하는 데 전념하는 급진적 단체인 크리스천 엠버시가 선전용으로 만들어 배포한 비디오에 펜타곤(5각형의 미국 국방부 건물)에서 군복 차림으로 있는 공군과 육군 장군들과 대령들이 나타났을 때, 군대의 정치화, 즉 민주주의를 수호하기보다는 특정 이데올로기를 촉진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믿음이 퍼지고 있다. 오늘날 급진적 기독교인들은 육·해·공군 군대와 사관학교에서 군목 임용의 대략 50퍼센트를 차지하며, 사관학교·경찰학교 생도들을 공공연히 개종시키고 다른 종교적 믿음들을 헐뜯기 위해 자신들의 지위를 점점 더 많이 사용한다.

크리스천 엠버시 비디오에서, 미국 보훈처 차관인 댄 쿠퍼는 그의 매주 기도 모임이 "직무 수행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육군 소장인 잭 캐턴은 자신이 미국 합동참모본부 고문이 된 것이 방어 정책을 수립하는 남녀들에게 복음을 전할 '놀라운 기회'라고 말한다. "나의 첫째 우선순위는 나의 믿음이다"고 그는 말한다.

종말과 성전(聖戰)에 대한 열망

성전(聖戰)에 대한 환상은 추종자들을 겁나게 하는 동시에 매우 기쁘게 한다. 그러한 환상은 기괴한 영적 진화론을 퍼뜨린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하늘로 올라가서 구원받을 테지만, 모든 열등한 믿음과 불신자들은 분노한 하나님에 의해 소름끼치는 종말론적 폭력의 아수라장 속에 잔인하게 멸망할 것이다. 이 최후의 전투에 대한 갈망이 전류처럼 그 운동을 관통한다. 기독교 우파 선동가들은 전쟁의 언어를 사용하고 전투의 은유로 말하고, 그리고 지구를 뒤덮을 폭력과 소란스러운 파괴의 생생하고 오싹한 장면들을 묘사한다. 전쟁은 그 운동의 궁극적 미학이다.

"오늘날 이 혁명은 온건주의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2006년 3월 로드 파슬리 목사가 워싱턴에서의 연설에서 군중에게 이렇게 외치는 것을 들었다. "이 혁명은 소심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안락한 지대로부터 걸어 나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참으로 결심하는 용감하고 강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에 당신들에게 대한 나의 충고는 이것이다. 경보를 울려라. 영적 침략이 벌어지고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세속적 미디어는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두 번씩 말하게 해 달라." 이 말이 이어지자 폭소가 터진다. "전투 부서에 병력을 배치하라! 무기를 갖춰라! 그들은 이 수사가 너무 자극적이라고 말한다. 나는 폭동을 자극하기 위해 왔다. 나는 교회의 심장과 영혼 속에 신성한 소란을 일으키기 위해 왔다. 전투 부서에 병력을 배치하라! 무기를 갖춰라! 실탄을 장전하라!"

무려 2만 5천 명의 사람들을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그리고 디트로이트의 기독교 록 콘서트에 끌어 모은 근본주의 기독교 청년 운동인 배틀크라이(BattleCry)는 자신의 메시지를 간절히 호소하기 위해 정교한 빛의 쇼, 군용지프, 미 해군 특수대원, 그리고 전투 이미지와 수사를 이용한다. 그 운동을 운영하는 론 루스는 젊은 기독교인들에게 그들 주변의 세속적 힘을 쳐부수라고 촉구한다. "이것은 전쟁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행동을 개시하라고 요청한다. 그분은 폭력적인 자들, '힘 있는' 자들이 하나님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한다"고 그는 말했다. 필라델피아 집회에서 연주한 록밴드 딜리리어스는 다음 가사의 노래를 힘차게 연주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 그리고 우리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이 커다란 마을을 온통 붉게 칠하자. 우리는 오직 예수의 피만 보네."

대규모 추종자들의 열광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정교한 극적 광경을 사용하는 것은 전체주의 운동의 한 주요 요소다. 그것은 젊은 지지자들에게 사랑과 증오, 기쁨과 슬픔, 흥분과 소속감을 위한. 즉 내면의 삶을 위한 원료를 제공한다. 개인에게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주는 환상을 전달한다. 그것은 삶에 의미와 목적을 주어서, 평범한 세속적 삶을 미국의 모든 선하고 순수한 것을 박살내려는 어둠의 세력에 맞선 서사적 싸움으로 바꿔놓는다. 그리고 중용의 목소리가 그것과 경쟁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이 극적 광경이 개인의 양심과 반성을 억누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지자들에게 민주 사회에서 보통은 금기시되는 폭력 행위에 참여하는 것을 수사학적으로 허락한다. 증오하는 것이 허용된다. 군중들은 유혹적인 폭력의 언어로 둘러싸이며, 이것은 조만간 실제 폭력의 행동을 낳는다.

종말론적 폭력의 정화하는 힘에 대한 황홀한 믿음은 희생자들의 자기 보호나 자기 방어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믿음은 범죄자 또한 벌을 받고서 사회로 원상 복귀할 권리가 있는 도덕적 우주 속으로 희생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대신, 희생자들은 이 악의적인 렌즈를 통해 더 이상의 전염과 타락을 멈추고 유토피아를 가져오기 위해 박멸해야 하는 사회의 오염 물질, 전염성 바이러스, 돌연변이로 간주된다. 이 신성한 폭력에서-그것의 뿌리가 성경이든,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이든, 계급 없는 사회의 꿈이든, 혹은 모든 '하위 인간'이 전멸되는 세계의 목표이든지 간에-가해자와 추종자는 자신들의 범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회피한다. 그들이 자행하는 잔인함은 인간의 폭력이 아니라 신적 분노의 표현으로서 신성시된다.

신성한 폭력으로 세상을 정화하겠다고, 시체더미들을 쌓아올림으로써 도덕적 오염에 대한 걱정을 제거하겠다고 약속하는 자들은 항상 우리의 가장 고귀한 감정, 최고의 미덕, 자기희생 능력, 그리고 깨끗이 정화된 삶에 대한 유토피아적 환상들에 호소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간 동포들의 박멸을 요구하고 실행하는 자들의 양심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환상적 희망과 깊은 절망의 이 결합, 즉 평화와 빛의 꿈들과 공포의 지배, 자기희생과 대량 살인의 결합이다.

미국은 기독교 파시즘 국가가 될 것인가

만일 이 대중운동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그 운동의 무자비함과 거짓, 그리고 그 운동이 자신의 수중으로 끌어들이려고 유혹하는, 주로 미국 사회의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차디찬 조작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급진주의자들의 의도를 이해하지만 그들에게 맞서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을 포함하는 사람들, 즉 이 대중운동을 마치 열린사회에서의 또 다른 중요한 합법적 참가자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도덕적 실패 때문에 그 운동은 성공할 것이다. 주류의 교회들에서부터 커다란 연구 대학들, 민주당, 미디어에 이르기까지, 관용과 자유를 옹호할 과업을 부여받은 주도적인 미국의 제도들은 정작 긴요할 때에 미국을 저버렸다. 이것은 무서운 관용의 역설이다. 열린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관용을 파괴하려는 자들을 더 이상 묵인해서는 안 되는 순간들이 생겨난다. 생각의 자유로운 교환과 자유를 유지하는 제도들이 그들의 책임을 물어야만 한다. 기독교 우파는 수천만 미국인이 시청하는 그들의 방송에서 증오에 찬 말을 할 때 그와 반대되는 다른 관점들을 포함하도록 강제되어야만 한다. 미국 사회의 총체적 부분들이 사탄의 조종을 받고 있기 때문에 개종이나 박멸에만 합당할 뿐이라고 말하면서, 악마로 매도하는 그들의 권리는 부정되어야만 한다. 기독교 우파의 발흥 앞에 수동적인 자세로 있는 것은 민주 국가를 위협한다.

주류 교회들은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교인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믿지도 않는 신조들을 중얼거린다. 주류 교회들은 성경 속의 어두운 환상들을 왜곡하고 무시할 수 있는 모호하고 자기만족적인 신학을 퍼뜨리려고 애쓰지만 이는 기독교 우파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일이다. 기독교 우파는 미국 사회의 질병들을 이해하며, 바로 그들 자신이 이 질병들을 이용해 우리를 폭정 속으로 몰아넣는다. 우파 지도자들은 자유주의 교회의 독특한 공허함, 소심함, 그리고 위선을 파악한다. 문화적 상대주의의 이름으로 그것을 묵인하는 사람들의 수동성에서 이득을 얻으면서도, 기독교 우파는 '문화적 상대주의', 즉 절대 선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가치 체계들은 동등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을 공격한다.

급진적 기독교 주권운동가들은 아무런 종교적 합법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파시즘으로부터 공산주의, 과거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인종적 민족주의 정당들에 이르기까지 다른 대중운동들과 많은 유사성을 가진 무시무시한 정치적 대중운동을 구축하기 위해 그들은 기독교를 조작하고 수백만의 신실한 신자들을 조종하고 있다. 이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주권운동도 모호함, 의심, 불확실성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 자신의 '진리'를 만들어 내고, 기적과 표징의 세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추종자들을 합리적이고 현실에 기초한 세계로부터 이동시킨다. 그것은 자기비판과 토론을 변절이라고 비난하고, 행동을 중시하며, 그리고 전쟁과 종말론적 폭력 속에서 자신의 궁극적 미학을 발견한다.

수백만 미국인을 그 운동 속으로 이끌어 온 고통, 혼란, 소외, 고통과 절망은 실재하는 것이다. 많은 미국인은 자신들의 삶이 붕괴된 것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는 문화에 반격을 가하고 있다. 그들은 민주적 전통과 계몽주의 가치가 자신들을 배반했다고 믿는다. 그들은 감각 상실, 고통이나 기쁨이나 사랑을 느끼지 못함, 거대한 공허감, 무서운 고독, 통제 상실에 관해 말한다. 개인적 자유와 선택으로 이루어진 합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세계는 많은 사람들을 차례차례 뱀 구덩이에 빠져들게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볼 때,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그들의 공동체, 가정, 삶이 분열되고 자멸할 때에도 수동적으로 방관했다.

이 절망 속에서, 이 신자들은 과학과 법과 합리성의 세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포기했다. 그들은 개인적 선택과 자유를 의도적으로 피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저버린 세계를 예언자와 신비한 표징으로 가득한 새롭고 영광스러운 세계로 대체해 왔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고, 자신들에게 직접 말하고, 미국의 운명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인도하는 창조자의 존재를 믿는다. 그들은 삶과 정치에서 자신들을 인도할 엄격하고 분명하게 정의된 도덕적 칙령들, 올바른 것들과 틀린 것들을 발견한 몽상가다. 그리고 그들은 표징, 경이로운 일, 그리고 도덕적 확실성의 이 새롭고 신비적인 세계를 잃는 것을, 즉 절망의 옛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 체계에 대한 과학자나 재판관의 비판을 그들을 다시 곤경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유혹하는 사탄의 악의적인 시도로 생각한다. 미국 내에서의 분열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이성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원인과 결과의 현실 세계 속에서 움직이는 자들과, 고립과 절망으로 감각이 마비되어 이제 신비적 직관의 세계, 더 이상 현실에 기초하지 않은 마법의 세계에서 의미를 찾는 자들 사이에 있다.

지금 주권운동가들은 좌절하고 소외된 자들의 분노를 연료 삼아 현실에 기초한 세계를 깔아뭉개고 침묵시키려고 싸운다. 주권운동은 무감각하고 용서 없는 것이 된, 일그러지고 파편화되고 방향 감각을 잃은 문화,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소속감과 보살핌과 목적을 제공하는 데 너무도 종종 실패해 온 문화, 그 운동 속의 많은 사람이 말하기 좋아하듯이 '죽음의 문화'가 되어 버린 문화의 덫에 걸린 사람들의 반응이다. 미국 사회에 대한 새로운 몽상가들의 비판이 언제나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것은 우리가 현재 견디고 있는 것보다 훨씬, 훨씬 더 나쁘다.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혁명적이다. 수천만 미국인의 공감과 지지를 받으면서, 한 무리의 종교적 몽상가들이 종교적 전제정치를 확립하기 위해, 즉 미국의 파시즘에로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민주적 제도들을 서서히 해체하고 있다.

4. 종교의 가면을 쓴 파시즘과 열린사회를 지키기 위한 싸움 -<지상의 위험한 천국>279~297쪽

종교의 가면을 쓴 파시즘

하버드 신학대학원 윤리학 교수였던 제임스 루터 아담스 박사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 기독교 우파 안에서 독일 기독교회와 나치당 사이의 불안한 유사점들을 간파했고, 그리고 장기적인 사회 불안정, 재앙이나 국가 위기 속에 미국 파시스트들도 기독교를 가장하여 열린사회를 해체하려 발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치 독일에서처럼 무익하고 무기력한 대화와 포괄주의에 관한 공허하고 진부한 말들을 뽐내어 말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절망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은 악의 유혹적인 힘이나 세상이 돌아가는 냉혹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나치 독일의 교회 지도자들 및 신학자들과의 긴 토론은 그의 삶을 규정짓는 경험이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나치 체제와 협력했고 일부는 저항했으며 대부분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전체주의 운동들이 제공하는 개인적·집단적 구원을 주겠다는 공상적 유토피아의 약속과 결코 경쟁할 수 없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어떻게 이에 저항할 수 있을지에 몰두했다. 애덤스는 신학자 폴 틸리히의 가까운 친구였다. 나치에 소리 높여 반대한 틸리히는 1933년 독일 대학에서 제명된 최초의 비유대인 교수가 되어 곧 추방당했다. 애덤스는 우리에게 교회의 역할은 사회 속에 있고 교회의 헌신과 믿음의 깊이는 정치와 문화에 참여하는 것으로 측정된다는 틸리히의 가르침을 상기시켰다. 믿음에 활기와 가치를 주는 것은 이 참여뿐이었다. 틸리히는 자기 주변의 불안하게 다가오는 위기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나치가 정권을 잡기 전에, 그는 나치가 설파한 불관용과 증오에 맞서 당당히 말했다.

종교의 가면이 어떻게 반종교(irreligion)를 은폐하는지를 애덤스는 보았다. 그는 "우리의 세계는 각자 충성을 요구하며 싸우는 믿음들이 넘쳐 폭발할 지경"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는 히틀러가 믿음의 의미를 가르친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무솔리니는 "믿어라, 따라라, 그리고 행동하라"고 외치곤 했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파시즘은 당이기 이전에 하나의 종교라고 말했다. 인간의 역사는 종교와 반종교 사이의 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는 믿음들의 전투, 즉 인간의 충성을 요구하는 신들의 전투"라고 애덤스는 말했다.

전체주의 세계에서는,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사적인 영역에 국가가 관여한다. 사랑할 자유-기독교인이 이슬람교도나 국가에 의해 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사랑할 자유-에 대한 최후의 결정적인 제한은 열린사회의 죽음을 예고한다. 기독교적 조화, 통일, 행복의 약속들-요약하면 유토피아-에 담긴 달콤한 유혹은 민주주의자들이 제공하는 미지근한 것들로는 결코 상대할 수 없다. 민주주의자들은 기껏해야 시민들에게 그들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그들 자신의 의미를 구축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파괴당하는 민주주의

본회퍼처럼, 애덤스는 다가오는 혼란의 시대에, 즉 그가 보기에 성경 메시지에 담긴 필연적인 싸움에서, 효과적으로 싸울 사람들이 제도 교회나 자유주의적·세속적 엘리트에서 나올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미디어는 물론이고 주요 연구 대학들에 대한 그의 평가는 시들해지고 있었다. 이 제도들은 만족할 만큼 파이가 충분히 주어지면, 자기 이익에만 신경 쓰면서 정부 및 기업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타협하고, 시대의 근본적인 도덕적 질문들과 불공평은 다루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자신들의 명성과 안락함을 희생시킬지도 모르는 싸움을 감수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독일 대학들이 얼마나 쉽게 나치화되었는지 보았다. … 애덤스는 또한 우리에게 미국 지식인들과 대기업가들은 1930년대에 공공연히 파시즘에 손을 뻗쳤음을 상기시켰다. 고삐 풀린 산업·기업 귀족정치를 낳은 무솔리니의 "협동조합주의"는 당시 많은 미국 대기업가들에게 매력적으로 여겨졌는데, 그들은 그것이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에 대한 효과적 견제라고 생각했다. 1934년 7월, <포춘>은 무솔리니가 노동조합이라는 장애를 없애고 노동자들을 희생하여 대기업가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준 것에 대하여 그 이탈리아 독재자를 찬양했다.

애덤스는 모든 민주 사회의 표면 아래 숨어 있는 분노와 편협함이 적합한 조건을 만나면 민주주의의 파괴를 요구하는 강령을 촉진하기 위해 분출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 불관용과 박해의 제도들에서 정말 악한 것은 범죄를 수행하는 보병들이 아니라, 그 어두운 격정들을 동원하고 분출하는 조직이다. 말년에, 그는 그러한 운동이 다시 행진을 시작하고 있는 것을 우려했다. 그것은 과거보다 더 세련되고 교묘히 포장되었고, 이번에는 아무런 진지한 반대도 없었다. 증오의 불길이 다시 지펴지고 있었다. 1930년대에 반격할 수 있었던 노동조합들과 진보주의자들은 힘을 잃었다. 적정한 임금과 수당을 지급하는 제조업 직종이나 일자리를 발견할 수 없어 절망한 수천만 미국인들이 이 환상적 설교자들의 영향력 속으로 이끌리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경제적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의 분노, 포위되고 불안정한 중류 계급의 두려움과 걱정들, 그리고 공동체 상실과 함께 오는 먹먹한 고립감은 위험한 대중운동을 부추길 것이다. 만일 이 좌절하고 소외된 파산자들이 주류의 사회 속으로 재통합되지 않는다면, 만일 그들이 그들 자신과 자녀들을 위한 안정된 좋은 직장과 기회, 요컨대 더욱 밝은 미래의 약속을 발견할 모든 희망을 잃는다면, 파시즘의 망령이 미국을 끊임없이 괴롭힐 것이다. 이 절망, 이 희망의 상실, 이 미래의 거부는 절망한 이들이 기적과 종말론적 영광의 꿈을 약속하는 자들의 영향력 속에 빠져들게 했다. 애덤스는 과거에 그것을 보았다. 그는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두려웠다.

열린사회를 지키기 위한 싸움

앨빈 토플러는 만일 당신이 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결국은 누군가의 전략 가운데 일부가 되는 걸로 끝난다고 말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저항하고 있는 고립된 단체들과 개인들이 있다. 애덤스와 틸리히 같은 신학자들의 생각에 비춰 보면, 멜 화이트 목사의 소울포스(Soulforce)가 동성애자들을 차별하는 기독교 대학들과 군 사관학교 바깥에서 전개하는 비폭력 저항은 신앙의 행동이다. '기독교인' 입후보자들을 홍보하는 초대형 교회들의 세금 면제에 문제를 제기하며 오하이오에서 단결해 온 성직자들과 랍비들은 신앙의 행동을 수행하고 있다. 창조론은 과학이 아니므로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한, 펜실베이니아 주 도버에서 공화당이 지명한 존 E. 존스 3세 같은 독립적 판사들의 판결은 신앙의 행동이다. 미국 최대 교구인 로스앤젤레스 대교구장 로저 마호니 추기경은 기독교 우파의 지지를 받고 있는, 국회에서 심의중인 불법 이주자들을 숨기고 보호하고 지원하는 것을 중죄로 취급하는 법률에 저항할 준비를 하라고 가톨릭교도들에게 요청했다. 그러한 시민 불복종은 신앙의 행동일 것이다. 기독교 우파의 극렬한 반대 때문에 지금 국회에 계류 중인 증오 범죄는 법으로 제정되어야 한다. 그것의 가결은 신앙의 행동일 것이다. 진정으로 뒤쳐진 사람들, 미국 도시의 빈민가와 황폐한 예전의 제조업 마을들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도움을 주도록 지시하는, 공동체를 보호하거나 확립하는 프로그램들은 신앙의 행동들이다. 만일 지구 온난화를 억제하지 않으면 우리를 괴롭힐 임박한 재앙의 중요성을 일깨우려는 전 부통령 앨 고어와 그 밖의 사람들의 용감한 노력은 신앙의 행동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기업국가(corporate state)를 해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소비자 기만이 되었다. 만일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이익을 위해 미국을 잡아먹고 있는 기업들을 저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업국가가 내던진 자들에게 급진적 기독교 우파가 끼치는 매력을 결코 약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거대한 빈곤 퇴치 운동에 자금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국가적 부와 자원을 새롭게 돌려야 한다. 우리는 기업복지(corporate welfare·기업에 대한 정부의 과잉 보조), 기업 범죄, 기업 구제를 위한 수천 억 달러의 긴급 융자를 끝장내고 노동법 개혁 같은 쟁점들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군산복합체, 그리고 더 넓게 보면 워싱턴을 지배하는 두 정당을 부유하게 하는 영구 전쟁의 순환을 억제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기독교 파시즘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싸움들이 있다. 그 싸움의 많은 것은 근처에서, 즉 우리 지역의 학교 위원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일의 대부분은 단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관련돼 있다. 그리고 애덤스는 우리의 지역사회, 우리의 나라, 그리고 지구 행성의 생명과 안녕에 일상적 참여가 없이는 우리들 중 아무도 자신의 믿음을 공언할 권리가 없다고 느꼈다. "나는 반나치주의자가 '만일 이십대 후반인 우리들 중 단 1천 명이라도 영웅적 저항에 결합했더라면, 우리는 히틀러를 멈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되풀이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애덤스는 우리에게 말했다.

급진적 기독교 우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배제, 잔인함, 그리고 불관용을 요구한다. 그 멤버들은 악을 위해 악을 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악을 행한다. 더 좋은 세상을 달성하기 위해, 일부는 고통을 받고 침묵되어야만 한다고, 그리고 그들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은 종말 때 멸망해야 한다고 그들은 믿는다. 인간 역사에서 최악의 고통은 그러한 웅장한 유토피아적 환상을 설교하는 사람들, 자신들의 편협하고 특정한 선에 대한 견해를 강제로 심으려 하는 사람들의 손으로 실행돼 왔다. 이것은 기독교에서부터 인종적 민족주의, 공산주의, 파시즘에 이르기까지 개인적 구원을 주겠다는 모든 교리들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보편적 선의 꿈은 박해, 고통, 그리고 대학살의 지옥을 낳는다. 지금까지 어떤 인간도 그러한 꿈을 달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완전히 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헛된 추구에서 나온 수많은 불운한 희생자들을 삼켜 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급진적 근본주의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존엄과 신성함을 박탈하고 그것들을 추상적 관념으로 바꿔놓게 하는 것은 바로 이상주의다. 그러나 우리가 공동체로서 그리고 개별적 인간으로서 살아남게 하는 것은 각각의 개인, 각각의 인간 생명의 신성함을 고수하고 우리의 믿음을 영웅적이지 않은 작은 동정과 친절의 행동에 두는 것뿐이다. 러시아 소설가 바실리 그로스만이 <삶과 운명>(Life and Fate)에서 썼듯이, 이상주의자들에게는 이 작은 친절의 행동들이야말로 몹시 두렵고 전복적인 것이다:

인간 역사는 악을 정복하려고 몸부림치는 선의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 친절함의 작은 핵심을 궤멸시키려고 몸부림치는 커다란 악이 벌이는 싸움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 존재 속의 인간적인 것이 지금까지도 파괴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악은 결코 승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수백 년 세월에 걸쳐 광범위하고 대개 관심이 다양했던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쓰였는데, 그것들 중 일부는 도덕적으로 옹호할 수 없었고 또 지금도 옹호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는 인간 존재의 신비 앞에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위치를 조명하도록 도와주는 강력한 구절들이 있다. 나 또한 성경 작가들처럼 이해하려고 애쓴다. 나 또한 종종 오해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은 정직과 엄격한 조사, 의심과 반대, 잘못과 후회, 다시 일어나서 계속해서 시도하는 능력이다. 알 수 없는 것 앞에서,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많은 것들이 존재함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이 자기비판, 자기 인식, 그리고 자기반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들은 동정과 친절의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들은 낯선 사람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고, 이 먼지투성이의 짧고 종종 외로운 삶의 길에서 우리와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연대성 속에 손을 뻗을 수 있게 한다. 이 정직과 겸손함이 다양한 관용적 인간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 그것들은 생명을 유지하고 그 모든 것의 한복판에서 희망을 전달한다.

주권운동은 기독교와 미국의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신이 옹호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파괴하려 한다. 미국이 불가피하게 파시스트 국가가 될 것이라고, 혹은 기독교 우파는 나치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급진적 기독교 우파는 열린사회에서 결코 같이할 수 없는 잠재적 원수라는 것을 나는 진심으로 믿는다. 그들의 이데올로기에는 기독교 파시즘의 교의들이 담겨 있다. 어떤 위기의 사건, 예컨대 또 다른 대재앙의 테러리스트 공격, 경제적 붕괴나 거대한 환경 재앙 사건에서, 그 운동은 무자비하게 두려움과 혼돈을 이용할 자세를 취하고, 그리고 미국을 그 나라가 건국된 이래로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개조할 것이다. 단지 신앙인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열린사회를 걱정하는 모든 미국인은 새로운 어휘로 이 운동에 관해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수동성을 버리고, 기독교를 제멋대로 거짓되게 도용하는 일에 공격적으로 도전하는 법, 그리고 관용을 옹호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이슬람교도, 유대인, 이주자, 동성애자, 여성, 학자, 과학자, 즉 그들이 '명목상의 기독교인'으로 간단히 처리하는 사람들과 '세속적 인본주의자'로 저주하고 낙인찍는 사람들의 권리와 믿음에 대한 이 운동의 공격은 우리 모두에 대한, 우리의 가치, 우리의 자유와 궁극적으로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다. 관용은 미덕이다. 그러나 수동성과 짝지어진 관용은 악덕이다.

나오는 말

거의 2000년 전에 기록된 복음서의 행간(行間)을 주의 깊게 읽으면, 예수(운동)는 권력 독재와 부(富)의 독점,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편협한 민족주의(국가주의)와 약탈적 제국주의, 생명을 억압하는 일체의 법과 전통에 온몸으로 강력히 저항한다. 그래서 사랑과 정의, 자유와 만인 평등, 나눔과 섬김의 새 세상을 꿈꾼다. 한마디로, 예수(운동)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갈망하며, 그리고 이런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명목상의 시혜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민중(풀뿌리) 민주주의에 기초한 명실상부한 민주 사회를 지향한다. 예수가 오늘 이 세상에 다시 온다면, 돈을 우상으로 삼는 자본주의 체제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얽히고설킨 반인간적 구조와 제도에 더욱 맹렬히 도전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예수(운동)가 지향하고 실천했던 것과는 거의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몹시 부끄러운 일이고 위험천만인 자기기만이다.

40년 가까이 교회 생활을 하고 또 오랜 세월 신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한국교회에 대해 느끼는 고질적인 문제점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성경을 글자 그대로 오류가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축자영감설과 그 자연스런 결과물로서 인간의 건전한 이성과 상식을 무시하고 심지어 적대시하는 맹목적 신앙, '역사적 예수(운동)'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없는 천박한 구원론과 믿음 만능주의, 타 종교와 다원주의·인본주의 가치들에 대한 편협하고 몰상식하고 적대적인 태도, 목회자들의 신성한 권위에 대한 암묵적 동의와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반민주적 교회 계급제도, 영육(靈肉) 이분법에 기초한 초월적 내세와 영적 구원에 대한 도취로 말미암은 '지금 이 땅'의 삶의 현실에 대한 저급한 수준의 인식과 비참여적 태도, '번영의 복음'에 기초한 물신(物神) 숭배와 친자본주의 경향, 신앙 검증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되어 버린 친미·반공주의, 종교의 예언자적 역할을 소홀히 하고 정치·경제 권력과 결탁하려는 일부 몰지각한 종교 지도자들의 권력 지향적 태도….

보통의 건전한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이런 문제점들에 비추어,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의 민주적 발전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한국 사회 발전의 골치 아픈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과 비판이 더러 있지만, 아직 한국교회는 단정적으로 '파시즘'이라고 지목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본질적 문제점들을 다각도로 심층 분석하면, 특히 그 문제점들을 단편적으로가 아니라 한국 사회와 연관 지어 구조적으로 인식하면, 한국교회도 미국을 좀먹는 기독교 파시즘의 양태에 상당히 근접해 있다고 뼈아픈 진단을 내려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변명의 여지없이, 주류의 한국교회는 신앙과 삶의 양태 둘 모두에서 반민주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이런 풍조는 종교적 파시즘으로 손쉽게 이어지고, 또 이 종교적 파시즘은 정치적 파시즘과 결탁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의 사활은 스스로 하느님의 자녀라 일컫는 '우리 안의 파시즘'을 포함하여 한국교회의 구조적인 파시즘적 요소들을 말끔히 청산하려는 뼈를 깎는 노력에 달렸다는 것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한다. 아직 한국교회는 소생할 가망이 충분하다. 하지만 기회를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한국교회는 머지않아 '사망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참고 문헌

1.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 - 다른 믿음과 생각을 부정하는 종교와 정치는 얼마나 위험한가>, 데이비슨 뢰어, 정연복 역, 샨티, 2007.

2. <지상의 위험한 천국 - 미국을 좀먹는 기독교 파시즘의 실체>, 크리스 헤지스, 정연복 역, 개마고원, 2012.

3. 브리태니커.

* 이 글은 2013.7.9.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주최로 '민주 사회와 종교'라는 주제로 열린 '2013년 만해축전 학술세미나' 발제 원고의 앞부분이다.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