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생각은 시대에 따라 바뀐다.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일컬었다. 이슬람에 넘어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무슬림과 싸우는 사람을 말할 때도 있었다. 지금은 절에 다니는 사람을 불교인이라고 말하듯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는 사람조차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교회 다닌다고 말하면 '아, 그래요?' 한다. '아, 그래요?'는 '너도 그놈들이랑 똑같은 거 아냐?'일 수도 있고, '거길 왜 다닐까?'일 수도 있다. '나도 교회 다니지만 당신을 믿을 수 있을까?'이기도 하다. '의외인데요. 교회에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있네요'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2천 년 전 그리스도인은 미친 사람들이었다. 어찌나 미쳤는지 죽는 줄 알면서도 예수님을 믿었다. 가난한 사람에게 먹일 양식이 없으면 금식해서라도 가난한 사람을 먹였다. 지금은 '아, 그래요?'의 대상이 되었다.

진짜 괜찮은 그리스도인도 많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양보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금한다. 선교 단체에 후원금을 보내고 가난한 나라 아이와 일대일 결연을 맺어 후원한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직장에서도 하나님 때문에 참는다.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다. 자기 생활을 충실하게 하며 그리스도인으로 괜찮게 살아간다. 이런 사람이 되자고 설교하고,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괜찮은 교회라고 칭찬받는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신 그리스도인이 정말 이런 모습일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괜찮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렇게 규정했기 때문에 말씀을 오해한 건 아닐까?

진짜 괜찮은 그리스도인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의 저자인 쉐인 클레어본은 우리가 괜찮게 보는 모습이, 예수님을 따르는 진짜 모습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는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칭찬받는 사람들이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살아간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다 팔아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한 말씀을 그대로 행한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 하셨으니 노숙자와 함께 자고 창녀를 집에 데려와 환대한다. 괜찮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나를 전혀 괜찮지 않은 사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다. 성경 공부와 찬양을 하며, 기독교 문화에 젖어 살았다. 스스로 기독교적인 것들로 피둥피둥 살이 쪘다고 말한다. 그 만하면 괜찮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박살내셨다. 물론 그도 단번에 소유를 다 팔아버리고 예수님을 따르진 않았다. 친구가 노숙자를 찾아갈 때 두려워하며 따라갔다. 친구가 노숙자와 잠을 잔다고 말할 때 턱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줄 알았지만 친구를 따라 갔다. 두려워하며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걸 안 뒤에는 돌아서지 않았다. 복음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그들의 짐을 나눠지는 거라고 믿었고 믿은 대로 행동했다.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쉐인 클레어본은 이를 증명하고 증거한다.

그는 폐쇄된 성당에 기거하던 40명가량의 노숙자들을 퇴거시킨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위해 싸웠다. 믿음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찾아 테레사 수녀가 있는 캘커타에 가서 나환자를 돌보았다. '여러분의 캘커타를 찾으라'는 테레사 수녀의 말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가난한 형제를 위해 수고하는 고귀한 대의도 좋지만, 부유함에 찌들어 가난한 이웃을 이웃으로 두지 않는 미국에서 싸움을 벌인다. 이 싸움은 쉽지 않다. 편안하게 살면서 가끔 노숙자를 찾아가고 휴가 기간에 캘커타와 같은 곳을 찾으면 굉장히 만족스럽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고, 자기만 생각하는 부자들을 멸시하며 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쉐인 클레이본은 괜찮은 그리스도인이 꺼리는 곳까지 나간다.

▲ 무소유 공동체 '심플웨이' 설립자이자 이 책의 저자인 쉐인 클레어본. (사진 제공 아바서원)

심플웨이 - 소박한 길

예수님과 선지자들이 목소리를 조금만 낮추고 사람들이 받아들일만한 수준으로 행동했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고 병자를 고치는 선에서 멈췄다면 환영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일하시기 때문에 일하셨다. 쉐인 클레어본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따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따르자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심플웨이'라는 무소유 공동체를 설립한다. 노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함께 놀아 준다. 여기서 멈추었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것이다. 복음을 좀 더 나은 삶, 양보하는 삶 정도로 받아들였다면 법정에 출두하고 공항에서 보안 요원에게 심문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를 자신에게만 적용하고, 복음을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축소하지 않았다. 그에게 공동체는 '내 집, 내 교회, 내가 함께 하는 노숙자 모임'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적당한 크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칭찬과 박수를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 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로 더욱 지나치게 행동한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때 바그다드에 가서 미군이 폭격하는 동안 가정과 병원을 방문한다. 그는 세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은혜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전쟁을 거스르기 위해 이라크에 갔다. 법률에 대항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행동을 계속 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행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는 정치와 사형 제도, 국가 정책에 반대해서 불편한 일을 겪더라도 복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라고 한다.

저항할 수 없는 혁명

책의 원제는 <irresistible revolution>이다. 쉐인 클레어본이 예수님을 믿어 온 행적을 주로 다루었으나 자서전은 아니다. 원제처럼 저항할 수 없는 혁명을 다룬 책이다.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복음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말한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공동체'를 말하고 '하나님나라'를 말한다. '나처럼 행동하라'가 아니라 '예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게 무엇일까?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면 함께 이 일을 행하라'고 말한다.

▲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 쉐인 클레어본 지음 / 배응준 옮김 / 아바서원 펴냄 / 400쪽 / 1만 6000원
책을 읽고 나서 <행동이 믿음을 증명한다>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어릴 적에 위인전 읽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대단하게 태어나서 3살에 천자문 끝내고 7살에 호랑이 잡고 10살에 과거에 합격한 영웅 앞에서 느낀 기분을 다시 느낀다. 예수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 앞에서 죄인이 된 것 같다. 이렇게 살지 못하면서 '이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라거나 '이 사람 괜찮다'고 말하기 부담스럽다. 이럴 때 찾아내는 괜찮은 도피처는 '교리의 오류'이다. 쉐인 클레어본처럼 행동하면서도 잘못된 교리를 전한 이단을 들먹이며 위험하다고 진단할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면 공격해서라도 무너뜨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내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그가 죄인이라고 몰아세워야 한다. 교리나 신학으로 따지면 저자도 걸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고 싶지 않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이 자꾸만 떠올라서 따질 수가 없다. 그만큼 저자의 삶과 말과 생각이 혁명적이다. 예수님이 역사에 일으킨 사랑의 혁명이 다시 생각난다.

쉐인 클레어본은 자신을 영웅으로 말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저항할 수 없는 혁명이며, 이 혁명은 행함으로 드러난다고 말한다. 제자는 행하면서 배운다.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내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 주시는 하나님이 정말 귀하다. 하나님이 주신 선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사람도 귀하다.

모든 책은 읽는 이의 생각에 무언가를 더해 준다. 삶의 방향과 구조를 조금이라도 바꿔 주는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 성경 외에 내 전부를 바꾸라고 요구하는 책은 거의 없었다. 이 책은 그런 요구를 한다. <그 청년 바보의사>, <난 당신이 좋아>, <지금, 행복합니다>처럼 강한 충격을 준다. 지금까지 괜찮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모습이 정말 괜찮은지 묻는다. 지금이라도 내 소유를 다 팔고 쉐인 클레어본처럼 예수님을 따라 나서야 한다는 마음이 나를 흔든다. 동시에 책을 소개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마음이 나를 뒤흔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무뎌지기 전에 무언가 덜컥 해 버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제국의 모순 논리에 현혹되지 않는 더 많은 바보들이,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힘보다 더 지혜롭다고 우기는 거룩한 바보들이 필요하다. 그러면 세상은, 우리가 미쳤다고 할 것이다.(365쪽)"
"어쩌면 우리가 약간 미쳤는지도 모른다.(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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