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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예수를 느낀다

정연복   기사승인 2013.05.14  01:5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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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춘기의 첫 종교 경험

요즘 아이들은 성장 속도가 무척 빨라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사춘기를 겪는다고 들었다. 그런데 나는 고등학교 입학 후 비로소 사춘기를 맞았다. 이 무렵, 동네 단짝 친구 손에 이끌려 교회라는 곳도 태어나 처음으로 나가게 되었다.

사십 년 가까이 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주일예배 때마다 목사님의 힘찬 설교를 들으면서 가슴이 벅차오르고 뭔가 뭉클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 난 적이 많았다. 기독교에 관해 전혀 모르면서도 긴 설교가 지루하기는커녕 꿀처럼 달았고 찬송가를 부를 때면 늘 마음이 찡했다. 예수가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참 신기하고 신화적이라고 여겨지지 않고 그저 예수라는 미지(未知)의 존재에게 죄송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열성적인 신자는 못 되어도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교회와 예수를 맨 처음 접했던 그 시절만큼 내 마음이 종교적으로 순수하고 활짝 열려 있었던 적은 없다. 사춘기라는 독특한 시기와 최초의 종교적 경험이 자연스럽게 만나서 그랬을까.

2. 정직한 의심 없는 두루뭉술 믿음

별로 논리적·이성적이지 못하고 다분히 감상적인 나는 기독교 신앙과 예수도 늘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접근했던 것 같다. 서서히 종교적 자의식이 싹트면서 예수의 '대속(代贖)'의 십자가 죽음이 이해가 잘 안 되고 약간 거부 반응이 생겼지만, '신앙이란 원래 이런 건가 보다' 하는 식으로 두루뭉술 넘어가기 일쑤였다. 소위 '민중신학'을 접하면서 전통 신학의 본질적 문제점과 한계에 눈뜨고 예수의 진면목을 조금씩 깨닫게 되기까지는, 나는 대체로 "의심은 곧 믿음 없음"이라는 틀에 갇힌 잘 길들여진 신자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어느 정도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전통 신학의 교리적·마술적 색채가 짙은 예수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진리라고 믿을 필요는 없고 또 믿어서도 안 되고, 성서든 교리든 본질적으로 '신앙고백'의 언어임을 감안할 때 그 참된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을. 정직한 의심이 없는 믿음은 좋은 믿음이 아니라 나태하고 천박한 믿음이라는 것을.

3. 예수를 만나거든 예수를 죽여라

불교에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여라"는 화두(話頭)가 있다. 부처를 진짜로 죽이라는 말이 아닐 것이다. 부처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에도 빠져들지 말라는 엄중 경고로 이해된다. 나는 이 화두가 기독교에도, 하나님과 예수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고 또 적용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제아무리 뛰어난 신학자와 목사도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예수는 이런 존재다"라고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다. 오히려 진실한 신학자와 목사라면 하나님과 예수의 존재 의미를 끝없이 물으면서도 자신의 신학적 진술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할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소박하게 표현하면 예수의 '그 무엇'이 내 삶의 의미와 목적과 방향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하다는 고백이 아닐까.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것이 바로 신적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은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되는 두 별개의 존재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인간적 깊이와 신적 초월은 맞닿아 있다.

예수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분이었기에, 그 예수의 삶과 죽음이 동시대의 어떤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종교적 충격을 주었을 테고, 그래서 예수가 지상에서 떠난 후에도 그에 대한 애틋한 추억과 그리운 마음이 하나둘 모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을 테고, 그런 과정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고 신격화되었을 것이다.

4. 내가 가끔 느끼는 예수

믿음이 정말 좋아서 삶의 매 순간 하나님과 예수의 현존을 느끼는 사람들도 더러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높은 수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가끔 예수를 생각하고, 어쩌다가 문득 예수가 그립고, 또 살아가다가 어느 한순간 예수를 느끼는 정도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예수와 전태일이 더러 겹쳐 보였다. 만년 소년같이 순수하면서도 때로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타오른 문익환 목사의 삶을 생각하면서 마치 목사님이 예수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평생 지독한 가난과 질병 속에 살면서도 때 묻지 않은 신앙으로 세상의 가장 버림받고 소외된 것들에서 거룩한 신성을 발견한 동화작가 권정생의 글을 읽으면서 '아마 예수도 이러했겠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아직도 나는 예수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복음서의 행간(行間)을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으로 더듬거리며 읽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제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내 삶의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예기치 않았던 곳에서 소스라치게 예수의 얼굴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라고.

5. 신학적 상상력

마태복음에서는 마구간 여물통에 태어난 한 힘없는 아기를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하나님 개념을 확 뒤엎는 혁명적인 신학적 진술이다. 세상을 구원할 힘은 세상의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온다고, 즉 김지하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바닥이 곧 하늘"이라고 선언하는 대담한 신학적 상상력의 표출이다. 인간성을 성실히 통과하지 않는 신성은 거짓임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아주 단순 소박하면서도 칼날 돋친 이야기다.

이 땅에 수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있는데, 아직도 대다수 신자들은 신앙과 신학의 영역에서는 건전한 이성과 상식을 전혀 발휘할 줄 모른다는 것이 무척 안타깝다. 참신하고 창조적인 신학적 상상력은 '신앙이 신앙답게'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을 이 땅의 신학자와 목사와 사제와 신자들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이 참 서글프다.

예수의 '그 무엇'에서 이 세상을 구원할 힘의 원천을 주체적으로 발견하고 그것에 잇대어 살아가는 것, 이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 땅의 모든 신자들이 한평생 풀어 가야 할 숙제다.

***

바람은 꽃잎 위에
머물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꽃잎들에게
찰나의 입맞춤을 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히 사라질 뿐

바람은 꽃잎에
연연(戀戀)하지 않는다.

꽃잎처럼 여리고 착한
영혼들에게

모양도 없이 빛도 없이
그저 한줄기 따스함으로 닿았다가

총총히 떠나간
그분의 삶이 바람이었듯

나의 남은 생애도 바람이기를!

(정연복·'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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