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4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에큐메니컬 신학 심포지엄이 열렸다. 생명평화마당 신학위원회와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가 공동 주최한 심포지엄에는 신학대 교수들이 발제자로 나서 'WCC 신학과 한국교회의 신학적 대응'을 주제로 WCC 공동선언문 4개 조항에 반박했다.

독자들이 WCC를 이해하기 쉽도록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발제문을 주제별로 하나씩 전문을 옮긴다. - 편집자 주

1. 들어가면서

지난 2013년 1월 13일 서울 명성교회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전진대회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2013년 WCC 부산총회 개최에 대한 보수 교단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4개 단체 대표가 서명한 "WCC 총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공동선언문 제4항은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로 무오하며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표준임을 천명합니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세 개의 조항은 WCC의 정책과 선교방향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지만, WCC가 성경무오설에 대한 어떤 입장 표명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제 4항의 성경무오설 문제는 다소 뜬금없이 보였고 그 주장의 배경적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궁금증으로 출발하여 공동선언문에서 밝힌 제4조항의 성경무오설 관련 주장이 어떤 배경적 의도를 갖는가를 그 안의 용어를 통해 설명하면서 성경의 진정한 권위는 역사 속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의 사건에 대한 증언에서 비롯되며,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의 사건은 성경 안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계속되는 계시사건이므로 이의 실천이 성경의 무오성을 증명하는 길임을 밝히고자 한다.

2. "성경 66권"의 의미

공동선언문은 성경무오설을 언급하면서 성경을 66권으로 못 박고 있다. 세계의 가장 큰 교회 협의체인 WCC는 349개의 교회와 교단을 회원으로 하고 있으며 동방정교회, 성공회, 침례교, 루터교, 감리교, 개혁교회, 연합교회, 독립교회 등이 주요 회원교로 참여하고 있다. 대부분 교회들은 구약성경 39권 신약성경 27권을 포함하여 성경의 총 66권의 책을 정경으로 인정하지만 동방정교회는 카톨릭(회원교는 아니지만)과 함께 제2경전이라고 불리는 성경책을 포함하여 정경으로 인정한다. 성경 66권이라는 주어의 선정은 경전의 범위를 다르게 출발하는 교회들을 논의 자체의 범주에서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성경 66권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과정은 오랜 기간의 논쟁과 회의의 결과이다. 먼저 구약성경은 1세기 말에 얌니아회의에서 39권을, 신약성경은 4세기 말엽인 397년 카르타고회의에서 27권으로 확정되었다. 성경의 책들이 경전으로 인정되는 과정이 이렇듯 오랜 과정을 거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후 4세기가 흘러서야 확정된 것은 성경 66권 자체가 역사적 결정임을 의미하며 성경무오의 주어를 66권으로 밝히는 것은 이러한 역사를 배제하고 최종적으로 정경의 범위를 정한 자신만의 전통을 정통으로 주장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3. '무오'의 의미

제 4항에서 주장하는 성경 66권의 '무오'가 어떤 오류를 염두에 둔 주장일까?를 검토해 보자. 소위 성경무오설이란 성경의 원본에는 사실(fact)과 어긋나는 어떤 것도 없다는 성경에 관한 교리이다. 성경무오설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이들은 성경은 연대기, 역사, 사회학, 심리학, 정치, 물리, 수학, 예술 등의 어떤 것에서도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좀 더 온건하게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성경이 하나님과 그분의 이상, 목적, 그리고 인류를 향한 복음을 성취할 때에만 성경이 옳다고 주장한다.

성경무오설이 주장하는 일점일획의 오류도 없는 원본이 될 성경은 불행하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의 복사본의 복사본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신약성경의 경우 5600개가 넘는 그리스어 성경 사본들(전체 혹은 부분)과 1만 개가 넘는 라틴어 사본, 그리고 500개 이상의 타 언어 성경 사본들이 존재한다. 가장 오래된 완성본 신약성경은 'Codex Sinaiticus'인데 여기에는 4세기에 경전에 포함된 두 권의 책이 빠져 있다. 신양성경의 가장 초기의 파편은 'Rylands Library Papyrus P52'인데 2세기 중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사본을 비교해보면 다양한 사본들 사이의 차이점이 20만 에서 30만 개가량으로 추정된다.

성경의 사본들이 많이 전승될 뿐 아니라 사본들 사이의 본문의 차이가 많다. 현대 신약성경의 본문으로 사용되는 'Textus Receptus'와 'Nestle-Aland Greek Text'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구약성경의 경우 중요한 두 사본-마소라 본문과 칠십인역-은 그 안의 책 배열이 다르며 본문의 차이도 많다. 특별히 예레미야의 경우 칠십인역 본문은 마소라 본문의 8분의 1정도 짧고 그 순서도 다르다. 칠십인역은 열방에 대한 예언을 25장 뒤에 배열해 놓았다(마소라 본문에는 46-51장이 열방에 대한 예언이다). 룻기를 예로 들어 구약성경 배열의 차이를 설명하자면, 칠십인역에는 룻기가 역사서 안에 배열되어 있지만 마소라 히브리 본문에서는 성문서 안에 포함되어 있다. 주후 2세기경의 서신인 사르디스의 멜리또 편지 안에 유세비우스가 인용한 멜리또의 편지에 룻기가 사사기 뒤에 나온다. 예루살렘의 희랍교부들의 도서관에 있는 책 MS 54.에는 히브리어-아람 성경의 목록이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여호수아, 신명기, 민수기, 룻기, 욥, 사사기" 순으로 나온다. 룻기가 성문서에 포함된 최초의 증거는 제롬 시대에 와서이다. 주후 1세기의 요나단의 타르굼(Targum of Janathan)에서 애가가 예언서에 포함되지 않으며 룻기와 함께 두 책이 성문서로 간주되었다.

전체 구약성경의 배열 순서도 사본들마다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대 유대 전승에서 정경은 사사기와 룻기, 그리고 예레미야와 애가가 각 한권 의 책으로 간주하여 22권으로 이해되었다. 요세프스와 제롬도 구약성경을 22권이라고 말하였다.

다른 한편 에스라 4서 14장 44절 이하에는 정경이 24권으로 언급되는데 이는 룻기가 사사기로부터, 애가가 예레미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뜻한다. 분리 후의 배열 순서가 어떠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이렇듯 성경 안에 다양한 배열의 순서는 성경이 무오하다는 주장에서 어떤 성경을 기준으로 무오를 주장해야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는 'KJV'와 그 모본인 'Texus Receptus'만을 성경으로 사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성경 안에는 과학적, 연대기적 오류나 내용 간의 모순이 존재한다. 가령 창세기 6장 13~22절과 7장 1~5절은 같은 사건을 묘사하면서 전자는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을 후자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방주로 데려올 것을 명령한다. 창세기 5장의 족보로 시작하여 연대를 따져 가면 천지창조부터 약 6천년이 되는데 이 사실은 과학적 사실과 배치된다. 사무엘상 13장 1절에는 사울이 한 살에 왕이 되었다는 표기상이 오류가 발견되기도 한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자연과학이나 인류학을 가르치는 목적으로 쓰인 책이 아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입장에서 보면 오류가 있다.

이렇듯 성경 안의 오류를 지적할 때 우리는 '주장'과 '설명'의 차이를 잘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는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 안에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들춰내어 '설명'하고 있다. 이 차이는 성경이 오류가 없다는 주장은 성경보다는 근본주의의 교리에 대한 지지를 성경의 무오성에서 끌어내려는 무모한 노력임을 보여 준다.

4. '최종적' 표준의 의미

성경은 신앙과 행동의 표준이다. 그러나 '최종적'이지는 않다. 성경은 계속되는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하는 신앙인들에게 현재 경험하는 계시의 의미를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이끄는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다.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이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표준이라는 주장은 하나님의 계속되는 구원계시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말이다. 현재의 계시 사건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계속되는 구원활동의 표본으로 고백하며 성경을 통해 그 의미를 재해석하는 상호적인 해석 과정 속에 성경(text)은 삶/역사를 해석할 맥락(context)을 제시하며 삶(context)은 하나님의 영감을 드러내는 또 다른 본문(text)이 된다.

과거의 구원 사건과 현재의 구원 사건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고백되기에 그 접점이 형성된다. 성경으로부터 교리적 개념을 도출해 냄으로써 이를 권위의 근거로 삼는 문자주의적 이해를 넘어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드러내고 그 구원 사건들을 통해 미래의 구원 사건의 희망과 약속을 확언해주는 구원의 표준이 됨으로써 권위를 갖게 된다.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 사건이 이후 세대에게 절대적인 표준이 된 사례를 이사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약성경의 이사야서가 8세기 예루살렘과 바벨론 포로지의 유대인 상황과 돌아온 귀환 공동체를 향한 예언을 담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듯 '이사야'라는 이름이 8세기에서 5세기까지의 3세대에 걸친 예언들을 포괄하는 대표적 예언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8세기 이사야라는 예언자의 구원예언이 실재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실현됨으로써 구원의 야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표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1이사야가 제2·3이사야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한 예언의 문구들 때문이 아니라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에서 아하즈 왕과 예루살렘을 구원해 주고 산헤립의 침공으로부터 히스기야 왕과 예루살렘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 때문이다. 이 예언은 사건으로 고백되고 있으며, 예루살렘을 위기 속에서 구원하신 야웨 하나님께서 위기에 처한 유대 포로민들을 출바벨론시켜 주시리라는 믿음의 표준이 된 것이다.

5. 성경무오설과 성경의 권위

성경 자체의 사실이 문자적 오류를 입증함에도 성경의 권위가 침해받지 않는 근거는 성경은 그 문자의 정확성에 있지 않고 성경이 증언하는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의 경륜과 그 계시 사건들의 특별성에서 기인한다. 장공 김재준의 말처럼 성서 자체의 사실이 문자적 무오를 입증해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구차스럽게 그 학설을 고집한다는 것은 '경건한 기만'이며, 성경무오설을 배격하는 것이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권위를 정당한 기초 위에 수립하려는 노력이다.

성경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방편이므로, 성경 본문(문자)를 누가 어디서 언제 어떻게 썼는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동요시킬 요인이 되지 못한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책이지, 그리스도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신조를 신앙고백적 입장에서 신앙 대상적인 입장에 올려 모시고 거기에 불변의 객관적 권위를 부여하고 그것으로 심판과 제재의 무기를 삼는 바리새적인 율법주의와도 같다.

성경의 참된 권위는 성경 내 문자의 '무오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한 인간 구원과 영생의 약속에 있음을 선언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선교사역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6. 성경무오설과 한국교회 분열의 역사

축자영감설과 문자무오설의 논쟁은 표면상으로는 성경관의 차이인 듯 보이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교리적 단일화를 강요하는 배타주의와 관용주의의 대결이다. 즉 교리적 단일화를 강요하는 배타주의적 종교 태도와 사랑 안에서 복음의 자유를 주장하는 포용주의의 대치이다. 한국 기독교는 선교 이래 성장의 축복과 함께 이러한 대결로 인한 분열의 아픔을 겪어왔다.

1) 한국장로교의 분열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로서, 그리고 한신대학교 구약 교수로서 공동선언문의 '성경무오설' 주장을 접하는 발표자로서는 지난 세기에 겪었던 한국장로교의 분열의 아픔을 떠올리게 된다. 1930년대 한국교회는 1932년부터 시작한 총독부의 신사참배 강요에 한국장로교총회가 1938년 9월 굴복하였고, 교리와 신학적인 측면에서는 교리주의와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에 철저히 종속되었다. 1934년 한국교회 첫 희년 예배에서 마펫(S.A. Maffet) 선교사는 40년 전 선교사가 전한 복음 그대로를 전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초기 한국교회 선교사들은 교리 제일주의를 강조했는데 교리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5대 원리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 성경의 절대 무오"이다. 이러한 신학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나서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근본주의이다.

근본주의 신학이 한국 신학계에 본격적으로 문제시되어 충돌하게 된 것은 1930년대 미국에서 신학 수업을 하고 돌아와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바탕으로 한 극단적인 성경관을 가진 박형룡에 의해 야기되었다. 이러한 보수적 선교사 중심의 신학은 성경의 문자무오설을 비판하고 고등비평을 옹호했던 장공 김재준과의 정면적인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김재준은 한국 교역자를 양성하는 선교사들이 한국인에게 스스로 생각하여 결단할 능력보다도 선교사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강력한 정통주의 신학을 주입시켰다고 비판하면서 주체적 신학 교육을 주창하였다.

1934년 제23회 한국장로교총회에서 남대문교회 목사였던 김영주 목사의 '모세의 창세기 저작 부인'과 김춘배 목사의 여권 옹호 발언이 제소되었다. 이에 대해 박형룡을 중심으로 한 연구위원회에서는 "모세의 창세기 저작을 부인하는 목사는 정확한 성경을 모독한 자인고로 우리 교회의 교역자 됨을 거절함이 가하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여권 문제에 대하여는 "성경에 여자 교권이 전혀 허용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권운동이 대두하는 현시대 사조에 영합하기 위하여 성경을 시대사조에 맞도록 자유롭게 해석하는 교역자들은 권장 조례에 의하여 처리함이 가하다”는 보고를 했다. 이 보고들이 그대로 통과되어 총회가 이를 선포했다. 다음 해인 1935년 총회에서는 유형기 목사의 편집 번역인 <단권성경주석>이 제소되어 장로교회에서는 이를 구독하지 말 것과 장로교의 집필자는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을 결정·선언했다.

김재준의 성경관이 총회에서 문제가 되고 장로교의 분열까지 이르게 된 사건은 1947년 4월 장로회 총회에서이다. 1947년 4월 제33회 장로회 총회에 신학교 학생 51명이 연서한 '진정서'가 제출되었다. 그리고 1949년 11월 시민관에서 열렸던 제1회 장로교 청년 전국대회에서 20세기 이후의 서구의 여러 신학사조, 특별히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주의 신학을 소개한 후 벌어진 질의응답의 내용이 분열의 불씨를 점화하였다. 이러한 분열은 1952년 전쟁 중에 열린 제35회 총회에서 김재준 교수의 면직과 조선신학교 졸업생을 채용하지 않을 것을 결의함으로 끝났으며, 1953년에는 두 개의 총회가 열렸다.

지금은 대부분의 신학교에서 역사 비평적 성경 해석을 교과에 반영하여 가르치고 있고 학회 등의 학술적 토론 모임에서 보수적 배경의 학자들이 역사 비평의 방법론에 입각한 논문을 발표한다. 진보적 학자들의 문학비평이나 최종 정경 비평적 성경 해석을 보수적 성경 읽기라고 비판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공동성명서를 통해 성경무오설이 공식 선언문으로 발표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또한 성경무오설에 대한 비평과 역사 비평적 성서 해석에서 출발한 성경관은 초기 한국교회의 근본주의 내지 정통주의의 신학적 폐쇄성과 독단주의를 깨뜨리고, 학문적 신학과 학문적 객관성에 눈뜨게 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참되게 추구하고 표현할 수 있는 '신학의 자유'를 되찾는 데 기여했음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신학의 자유를 통해 한국교회는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처할 유연성을 가지게 되었고, 197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서 일어난 이른바 '미시오 데이(Missio Dei)'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가 되었다.

2) 근본주의의 부활과 성경무오설

최근 근본주의에 대한 정의는 교리적 특징보다는 보다 포괄적으로 자신들의 오래된 종교, 사회전통을 고수하기 위한 전투적 종교집단을 지칭한다. 카펜터는 근본주의의 특징으로 "문화적 소외(cultural alienation), 분파적 행동(sectarian behavior), 그리고 지적 침체(intellectual stagnation)"를 꼽는다.

자신들의 오랜 전통을 고수하기 위한 한국 근본주의자들의 전투적 행동은 최근 공격적인 해외선교와 물량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한국교회 대형 교회들의 정치 참여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한국의 기독교 보수주의자들 중 근본주의자들과 오순절주의자들이 현실 정치에 깊게 참여하고 있다. 이들 근본주의자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신들은 선하고 다른 자들은 악하다고 믿는 것이다. 현실을 보는 눈이 이분법적이다. 배타주의는 분열과 대립을 낳는다.

이들과 이를 뒷받침해 주는 대형 교회들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수구적 이념에 대한 증거 구절(proof-text)로만 성경을 보는 축자주의(문자 하나하나를 그대로 따르는 방식)를 옹호한다. 성구를 인용하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가를 주장한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축자주의는 세상에 없다. 선택적 축자주의만 있을 뿐이다. 이처럼 제멋대로 선택한 증거 구절로 만들어내는 교리 체계나 교회의 가르침은 실상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없다. 그리 주장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이 믿는 성경과 내가 읽는 성경은 전혀 다르고, 당연히 그들이 믿는 신과 내가 믿는 하느님은 전혀 다르다. 동남아에 닥친 쓰나미나 미국 남부에 닥친 허리케인 카트리나 등,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낸 자연 재앙에 대해 이는 불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하는 어느 대형 교회 목사나, 성경의 자구를 들어 여성 목회자들에 대해 기저귀 발언을 서슴지 않는 어느 신학교의 총장이 나에게는 다른 종교인으로까지 여겨진다.

7. 공동성명서 제4항의 의미

공동성명서에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로 무오하며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표준임을 천명합니다"는 주장이 등장한 이유는 우연이나 뜬금없는 것이 아니다. 제4항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성경무오설의 근본주의적 교리를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복음에 근거해 절대화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특정 교회들의 신앙과 행동을 비복음주의적이요 반복음적인 것으로 매도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성경의 권위주장과 성경을 통한 자신들의 권위주장이 분리되어야 하지만 이 둘이 혼재되어 있다.

더욱 심각한 점은 성경무오와 성경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권위를 마지막 조항으로 명시함으로써, 앞서 '인본주의'·'자유주의'·복음주의' 등의 딱지 붙이기식으로 열거하면서 반박한 조항들은 자연스레 반복음주의적이고 반성경적인 행동으로 규정하는 효과가 있다. 제4항으로 공동성명서는 보수 교회들의 우려를 성경에 근거하여, 자신들은 성경에 근거하고 있음을 재확인한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로서 다른 교회 지체들과 열린 대화를 통해 다양성 속에 일치를 찾아나가려는 WCC 산하의 많은 교회들의 노력을 일순간에 몇 개의 빨간 딱지 붙이기로 마무리하는 셈이다.

8. 마무리하면서

성경에 어떠한 오류도 없다는 극단적인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오류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필사의 오류에서 시작하여 성경 안에서의 증언의 충돌, 그리고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증언 등 오류의 범위는 넓다. 성경무오설을 옹호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비판할 수 있느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오히려 성경의 오류를 비평적 성찰을 통해 재해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화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선포하는 "경건과 학문"의 노력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고 감탄까지 하셨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기에 좋았다고 반복해서 감탄하셨다.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의도와 그 결과로서의 피조 세계의 온전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탐욕과 교만으로 인해 피조 세계가 오염되고 그 온전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처럼 성경 역시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와 성령을 통한 계시의 온전성은 인간의 언어적, 문화적, 사회적 한계를 포함한 다양한 제한적 능력으로 인해 그 온전성을 책 안에 담아내지 못했다.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경을 책으로 보존, 전승해 온 결과 인간적 오류와 편견이 성경 안에는 함께 보존되고 전승되어 왔다. 이는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고 비평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책으로 담은 인간이라는 도구의 편견과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죄와 타락을 돌아보고 성찰, 반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온전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듯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 인간의 한계로 인해 비롯된 오류와 편견을 담은 내용들을 비판적으로 살펴 그 속에 숨은 하나님의 뜻을 밝혀내는 것이 불순종이나 불신앙의 표징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워지려는 경건의 행보이다.

울라프 픽쉐 트베이트 WCC 총무의 말대로 이번 성명서에 열거된 조항들은 한국기독교사 뿐만 아니라 세계 교회 역사에서 계속해서 논쟁되어 온 사실이다. 새로운 주제도, 논쟁거리도 아니다. 성경관을 포함해서 신앙의 다양한 관점들은 그것이 보수이든 진보이든 어느 방향성을 지향하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신앙은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인간의 정체성과도 연관이 있는 문제이므로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공동성명서는 열거된 주제들에 대한 논쟁이 아니다. 이번 공동선언문은 WCC 회원 교회들이 모여 여는 총회를 준비하는 데 총회가 열리는 한국에 있는 교회들이 WCC 회원 교회들의 신앙과 실천을 몇 개의 단어로 단정하고 그들을 반성경적인 행태를 자행하는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1.13 공동선언문은 이에 대한 폐기선언이 반드시 공식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NCCK와 WCC라는 공식적인 협의체, 그것도 WCC총회 준비위원회를 준비하는 두 위원장의 이름으로 이번 공동성명서가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WCC가 총회 개최여부의 위험성이나 재정적인 지원에 차질을 줄 것을 우려하는 등의 정치적인 핑계로 이를 회피한다면 NCCK나 WCC는 회원교회들의 정체성을 반성경적 행태로 전락시키는데 동조하는 꼴이다.

NCCK와 WCC한국준비위원회는 성경이 애굽에서 노예들을 해방시키시고, 과부, 나그네, 고아들의 안녕을 돌봐줄 것을 명령하시며, 죄인들과 식탁 교제를 나누시고, 십자가의 고통까지도 감수하시며 생명을 살리시는 생명의 하나님을 증언함을 고백하는 교회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그 생명의 하나님이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심을 증언하는 총회 마당을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영미 / 한신대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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