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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 만에 무죄, "진실은 드러난다"

[인터뷰] '민청학련' 박형규 목사, '법정서 내란예비음모죄 오명 풀다니'

이용필 기자   기사승인 2012.09.17  20: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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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란예비음모죄로 38년 전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박형규 목사가 지난 9월 6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무죄를 구형한 검사는 "가슴에 날인으로 새겨진 주홍글씨가 법의 이름으로 지워지길 바란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1974년 8월 9일, 비상보통군법 결심공판장에 전직 대통령과 목사가 들어섰다. 그 뒤를 부인들이 따라 들어왔다. 전직 대통령은 따로 마련된 의자에, 목사는 피고석에 앉았다. 군법은 공판장에 네 사람 외에는 출입을 금지했다. 조금 뒤 군복을 입은 재판관들이 등장했다. 최후 변론에서 전직 대통령은 재판관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나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정당한 의사를 밝히는 학생들을 잡아 가두는 정부를 비난했다. 재판관들은 아무 말 없었다. 전직 대통령은 형벌은 내릴 수 있어도,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소신만큼은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목사는 독재 정권 하에서 재판을 받는 것 자체가 꼭두각시놀음과 같다며, 최후 변론을 거부했다.

군법은 3일 뒤 열린 선고 공판에서 전직 대통령에게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목사에게는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죄목은 내란예비음모죄였다. 전직 대통령은 4대 대통령 윤보선, 목사는 빈민 선교와 민주화 운동의 대부 박형규였다. 그해 유신정권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표적으로 삼아, 이 조직에 가입하거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하는 자에게는 최고 사형까지 내릴 수 있는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다. 

"여정남은 사형당했는데 나는 살았다"

긴급조치 4호 발표에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유신 반대 투쟁이 거세게 일어나자, 유신 정권은 그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 이는 대구, 경북 지역의 혁신계 인사들이 1964년 적발된 인혁당을 재건해 민청학련의 유신 반대 투쟁을 조종하고 북한의 사주를 받아 정부 전복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박 목사는 학생들의 유신 반대 운동을 적극 지원했고, 윤 전 대통령은 박 목사에게 수시로 자금을 댔다. 자금은 윤 전 대통령의 아내인 공덕기 여사와 이우정 교수를 거쳐 박 목사에게 전달됐다. 윤 전 대통령뿐 아니라, 고위 공직에 있는 박 목사의 친구들도 자금을 조달했다.

   
▲ 박 목사는 긴급조치 4호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학생들에게 활동 자금을 댄 이유로 9개월 동안 실형을 살다가 1975년 2월에 출소했다. 사진은 민청학련 사건을 보도한 외신 기사. ⓒ뉴스앤조이 이용필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를 앞두고 계획이 탄로 나게 되면서 민청학련 관계자들이 무더기로 잡혀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당시 박 목사 측 학생이었던 여정남 씨가 인혁당과 연루됐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고, 채 20시간도 안 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는 사법 역사상 최악의 판결로 남았다. 박 목사는 "여정남이 단지 대구 사람이라는 이유로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쏟아냈다. 

1974년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박 목사는 9개월 만에 출소했다. 박 목사는 출소하게 된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박 목사가 수감됐을 때 아들 박종렬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 공동대표가 박 목사가 쓴 설교와 칼럼을 묶은 <해방의 길목에서>라는 책을 출판했다. 출판기념회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재야인사가 참여했고, 책은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됐고, 박 목사가 북한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증명돼 정권으로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박 목사가 6·25 전쟁 당시 맥아더 사령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며 미국과 맺은 인연 덕이다. 부산에 있을 당시 미국문화원에서 일한 경험으로 오키나와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로 가게 됐고, 거기서 미국 측 인사들과 폭넓게 인연을 쌓은 것이다. 실제로 박 목사가 감옥에 들어갈 때마다 미 대사관이 당국에 보호 요청을 하는 등 유신정부를 압박했다. 

출소 후에도 박 목사는 빈민 선교와 민주화 운동의 길을 지속해서 걸었다. 운동권 학생들의 보호자가 돼 그들을 지원했다. 인혁당 사건 이후 정권이 위수령을 선포했을 때(1965년) 학생들의 활동이 제약되자, 교회 공간과 자금을 제공하며 유신 정권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도우미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박 목사는 훗날 이러한 사실을 인정받고, 민주화를 이룩한 공로로 지난 4월 30일 성공회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가슴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내란예비음모죄'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지 38년이 흘렀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9월 6일 열린 '민청학련' 재심에서 박 목사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번 재판은 박형규 목사의 아들인 박종렬 공동대표가 2010년에 재심을 청구해 다시 법정에서 다뤄지게 된 것이다.

담당 검사는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해 권력의 채찍을 맞아 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간 사람들과 몸을 불살라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면서 "그분들의 가슴에 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됐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 9월 12일 용인 수지에 있는 자택에서 박형규 목사를 만났다. 박 목사는 "민청학련은 잊힌 사건"이라고 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상이 새로워진 것 같아 감개가 무량하다"고 했지만, <뉴스앤조이>와의 만남에서는 "잊어버린 사건이어서 (이제야 무죄 판결이 난 것이) 솔직히 황당했다"고 했다. 민주화 운동을 하며 여섯 번의 옥고를 치르고 공안 당국에 불려가 수없이 조사를 받은 그로서는 까마득한 사건이었고, 진실이 드러나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죄를 선고받았을 때 먹먹했다. 

재판을 받기 위해 오랜만에 들어선 법정은 생경했지만, 과거 윤 전 대통령과 함께했던 법정에 섰던 느낌이 수십 년만에 되살아났다. 재판이 끝난 후 무덤덤하게 법정을 나서는 박 목사에게 누군가 다가와 정중히 사인을 요청했다. 박 목사에게 무죄를 구형한 검사였다. 박 목사는 "흔쾌히 사인을 해줬다"면서 웃었다. 이날 판결에 대해 박 목사는 "최근 정치를 보고 있으면, 유신정권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기에, '무죄'를 받은 의미가 크다"면서 "진실은 드러나고 밝혀진다"고 평가했다. 

"시대의 아픔을 품지 못하면 가짜 목사"

 

 

   
▲ 박 목사는 4.19 혁명 당시 "총에 맞아 죽어 가는 학생들을 보고 목회 철학이 바뀌었다"고 했다. 이후 박 목사는 청년과 여성을 대상으로 의식화 교육을 시행하며,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박 목사는 공덕교회와 초동교회를 거쳐, 지난 1992년 서울제일교회에서 은퇴했다. 대외적으로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부터 CBS 상무, <기독교사상> 주간을 맡는 등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활동을 해 왔다. <기독교사상> 주간 시절에는, 종교·경제·사회과학 등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을 섭외해 기독교 학문의 지평을 한층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CBS 상무 때는, 강원룡 목사의 설교를 통해 전태일의 죽음을 알렸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담 프로에 초청, 그의 입을 통해 정권을 비판하기도 했다. 

 

 

박 목사가 빈민 선교부터 사회운동에 나서게 된 계기는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나오다가, 우연히 경무대(현 청와대) 앞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는 학생들을 목격하고 나서부터다. 당시 그의 목회 철학은 가난한 사람을 전도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 전부였다. 박 목사는 4·19혁명을 통해 목회 철학이 바뀌었다. 총에 맞아 피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가책을 느낀 그는, '진짜 목사가 아니었다'면서 "온종일 학생들을 따라다녔다"고 회고했다. 

1923년 경상남도 마산의 산골에서 태어난 박 목사의 이름은 원래 성도였다. 거룩할 성에, 길 도였다. 어머니가 예수를 믿으며 그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박 목사는 후에 동경신학대학에서 수학하며, 강원용 목사를 만나 인생이 전환됐다. 1954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장공 김재준 박사의 가르침으로 거듭났다. 

박 목사는 내년이면 아흔이다. 2시간 넘는 긴 인터뷰에도 그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지난 과거의 기억 역시 또렷했다. 박 목사는 은연중 현재 정권이 교체되길 바라는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한국교회에 대한 쓴소리도 내뱉었다. 박 목사는 대형 교회보다는 소·중형 교회가 많아져야 한다면서 "그래야 목사가 주관과 소신대로 목회할 수 있다"고 했다.

 

   
▲ 박종렬 목사(사진 왼쪽)는 아버지 박 목사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돼 있을 때, 박 목사의 칼럼과 설교를 묶은 <해방의 길목에서>를 출판했다. 박종렬 목사는 "책을 통해 아버지가 북한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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