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8월 9일, 비상보통군법 결심공판장에 전직 대통령과 목사가 들어섰다. 그 뒤를 부인들이 따라 들어왔다. 전직 대통령은 따로 마련된 의자에, 목사는 피고석에 앉았다. 군법은 공판장에 네 사람 외에는 출입을 금지했다. 조금 뒤 군복을 입은 재판관들이 등장했다. 최후 변론에서 전직 대통령은 재판관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나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정당한 의사를 밝히는 학생들을 잡아 가두는 정부를 비난했다. 재판관들은 아무 말 없었다. 전직 대통령은 형벌은 내릴 수 있어도,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소신만큼은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목사는 독재 정권 하에서 재판을 받는 것 자체가 꼭두각시놀음과 같다며, 최후 변론을 거부했다.
군법은 3일 뒤 열린 선고 공판에서 전직 대통령에게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목사에게는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죄목은 내란예비음모죄였다. 전직 대통령은 4대 대통령 윤보선, 목사는 빈민 선교와 민주화 운동의 대부 박형규였다. 그해 유신정권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표적으로 삼아, 이 조직에 가입하거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하는 자에게는 최고 사형까지 내릴 수 있는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다.
"여정남은 사형당했는데 나는 살았다"
긴급조치 4호 발표에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유신 반대 투쟁이 거세게 일어나자, 유신 정권은 그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 이는 대구, 경북 지역의 혁신계 인사들이 1964년 적발된 인혁당을 재건해 민청학련의 유신 반대 투쟁을 조종하고 북한의 사주를 받아 정부 전복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박 목사는 학생들의 유신 반대 운동을 적극 지원했고, 윤 전 대통령은 박 목사에게 수시로 자금을 댔다. 자금은 윤 전 대통령의 아내인 공덕기 여사와 이우정 교수를 거쳐 박 목사에게 전달됐다. 윤 전 대통령뿐 아니라, 고위 공직에 있는 박 목사의 친구들도 자금을 조달했다.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를 앞두고 계획이 탄로 나게 되면서 민청학련 관계자들이 무더기로 잡혀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당시 박 목사 측 학생이었던 여정남 씨가 인혁당과 연루됐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고, 채 20시간도 안 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는 사법 역사상 최악의 판결로 남았다. 박 목사는 "여정남이 단지 대구 사람이라는 이유로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쏟아냈다.
1974년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박 목사는 9개월 만에 출소했다. 박 목사는 출소하게 된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박 목사가 수감됐을 때 아들 박종렬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 공동대표가 박 목사가 쓴 설교와 칼럼을 묶은 <해방의 길목에서>라는 책을 출판했다. 출판기념회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재야인사가 참여했고, 책은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됐고, 박 목사가 북한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증명돼 정권으로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박 목사가 6·25 전쟁 당시 맥아더 사령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며 미국과 맺은 인연 덕이다. 부산에 있을 당시 미국문화원에서 일한 경험으로 오키나와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로 가게 됐고, 거기서 미국 측 인사들과 폭넓게 인연을 쌓은 것이다. 실제로 박 목사가 감옥에 들어갈 때마다 미 대사관이 당국에 보호 요청을 하는 등 유신정부를 압박했다.
출소 후에도 박 목사는 빈민 선교와 민주화 운동의 길을 지속해서 걸었다. 운동권 학생들의 보호자가 돼 그들을 지원했다. 인혁당 사건 이후 정권이 위수령을 선포했을 때(1965년) 학생들의 활동이 제약되자, 교회 공간과 자금을 제공하며 유신 정권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도우미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박 목사는 훗날 이러한 사실을 인정받고, 민주화를 이룩한 공로로 지난 4월 30일 성공회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가슴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내란예비음모죄'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지 38년이 흘렀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9월 6일 열린 '민청학련' 재심에서 박 목사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번 재판은 박형규 목사의 아들인 박종렬 공동대표가 2010년에 재심을 청구해 다시 법정에서 다뤄지게 된 것이다.
담당 검사는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해 권력의 채찍을 맞아 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간 사람들과 몸을 불살라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면서 "그분들의 가슴에 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됐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지난 9월 12일 용인 수지에 있는 자택에서 박형규 목사를 만났다. 박 목사는 "민청학련은 잊힌 사건"이라고 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상이 새로워진 것 같아 감개가 무량하다"고 했지만, <뉴스앤조이>와의 만남에서는 "잊어버린 사건이어서 (이제야 무죄 판결이 난 것이) 솔직히 황당했다"고 했다. 민주화 운동을 하며 여섯 번의 옥고를 치르고 공안 당국에 불려가 수없이 조사를 받은 그로서는 까마득한 사건이었고, 진실이 드러나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죄를 선고받았을 때 먹먹했다.
재판을 받기 위해 오랜만에 들어선 법정은 생경했지만, 과거 윤 전 대통령과 함께했던 법정에 섰던 느낌이 수십 년만에 되살아났다. 재판이 끝난 후 무덤덤하게 법정을 나서는 박 목사에게 누군가 다가와 정중히 사인을 요청했다. 박 목사에게 무죄를 구형한 검사였다. 박 목사는 "흔쾌히 사인을 해줬다"면서 웃었다. 이날 판결에 대해 박 목사는 "최근 정치를 보고 있으면, 유신정권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기에, '무죄'를 받은 의미가 크다"면서 "진실은 드러나고 밝혀진다"고 평가했다.
"시대의 아픔을 품지 못하면 가짜 목사"
박 목사는 공덕교회와 초동교회를 거쳐, 지난 1992년 서울제일교회에서 은퇴했다. 대외적으로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부터 CBS 상무, <기독교사상> 주간을 맡는 등 다양한 사회 영역에서 활동을 해 왔다. <기독교사상> 주간 시절에는, 종교·경제·사회과학 등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을 섭외해 기독교 학문의 지평을 한층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CBS 상무 때는, 강원룡 목사의 설교를 통해 전태일의 죽음을 알렸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담 프로에 초청, 그의 입을 통해 정권을 비판하기도 했다.
박 목사가 빈민 선교부터 사회운동에 나서게 된 계기는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나오다가, 우연히 경무대(현 청와대) 앞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는 학생들을 목격하고 나서부터다. 당시 그의 목회 철학은 가난한 사람을 전도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 전부였다. 박 목사는 4·19혁명을 통해 목회 철학이 바뀌었다. 총에 맞아 피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가책을 느낀 그는, '진짜 목사가 아니었다'면서 "온종일 학생들을 따라다녔다"고 회고했다.
1923년 경상남도 마산의 산골에서 태어난 박 목사의 이름은 원래 성도였다. 거룩할 성에, 길 도였다. 어머니가 예수를 믿으며 그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박 목사는 후에 동경신학대학에서 수학하며, 강원용 목사를 만나 인생이 전환됐다. 1954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장공 김재준 박사의 가르침으로 거듭났다.
박 목사는 내년이면 아흔이다. 2시간 넘는 긴 인터뷰에도 그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지난 과거의 기억 역시 또렷했다. 박 목사는 은연중 현재 정권이 교체되길 바라는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한국교회에 대한 쓴소리도 내뱉었다. 박 목사는 대형 교회보다는 소·중형 교회가 많아져야 한다면서 "그래야 목사가 주관과 소신대로 목회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