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강원용 목사. (사진제공 노컷뉴스)
여해 강원용(1917~2006)의 생애는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그 궤적을 함께 해왔다.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한국전쟁, 근대화와 민주화 그리고 남북 협력의 시대로 이어지는 현재까지 한 세기 동안 그는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1917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강원용 목사는 1935년(당시 18세) 소 판돈 70원을 가지고 농민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만주 용정으로 건너갔다. 그곳 은진중학교에서 윤동주시인, 문익환 목사와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내며 농촌 계몽 활동을 하였고 암울한 조국현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강원용 목사는 당시 은진중학교 교사였던 김재준 목사로부터 기독교적 세계관에 관하여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강 목사는 두 가지 커다란 계기를 접하게 된다.

김규식, 여운형 등과의 만남을 통해 청년대표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면서 건국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선린형제단을 결성하고 김재준 목사를 설교자로 모셔와 1945년 12월에 지금의 경동교회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당시 김재준 목사는 진보적인 신학교(현재의 한신대학교)를 세웠고 경동교회는 기독교 장로교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하였다.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등 격동의 세월을 겪은 후 유학길에 오른 강 목사는 1956년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그의 스승이었던 폴 틸리히과 라인홀드 니이버 교수를 만나면서 자신의 신앙과 사유에 적지 않은 변화를 경험한다.

기독교 현실주의에 기초한 ‘사이․너머’(Between and Beyond)라는 그의 철학은 양극의 대립과 갈등 지점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 간 상호이해를 통해 이를 넘어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것이었다.

어느 한 쪽을 강요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의 입장은 늘 양 쪽으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았으나 외롭지만 용기 있는 선구적 삶을 살아왔다.

1960년대 초반, 강 목사는 귀국 후, 이러한 입장을 실천하기 위해 기독교 사회문제연구원으로 출발하여 1965년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대화 중심의 아카데미운동’에 몰입한다.

입장이 다른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숙식을 같이하는 며칠간의 대화 모임은 분단과 대립으로 경직된 당시 우리 사회에 유일한 소통의 장이었다. 1965년 6대 종교가 한자리에 모인 종교간 대화 모임은 세계적인 종교 간의 대화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 후 강 목사는 종교인들의 사회 참여 및 평화운동을 전개하고자 구성된 아시아 종교인 평화회의(ACRP),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의 의장 등을 역임하면서 종교 간의 대화에 기여한 공로로 니와노평화상, 만해평화상 등을 수상하기도 한다.

강 목사의 아카데미운동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고 안식일도 인간을 위해서 있다는 그의 화육(化肉) 신앙에서 출발한다.

많은 사회 활동을 통해 강 목사가 지향하는 사회는 하나님의 사랑이 중심이 되는 화해 공동체였다. 이를 현실에서 실천하기 위한 사회적 표현이 ‘인간화’였으며 이를 위한 과정과 방법은 ‘대화운동’이었다.

특히 70년대 양극화와 비인간화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실천으로 중간집단육성강화교육을 비롯하여 민주화, 노사 간의 대화, 성 평등 실현 등 다양한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를 통하여 사회 각계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우리 사회에 그가 던진 사회적 메시지와 더불어 60~70년대 그가 일구어낸 우리 사회의 많은 인재들은 90년대 시민사회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 6:33)를 우선가치로 삼았던 강 목사는 해방 이후 줄곧 한국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1970년대에는 김수환 추기경, 험석헌 선생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고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항상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로 현실 정치에는 거리를 두어왔다.

한편 강 목사는 1948년 이후 세계교회운동에 참여하면서 한국교회가 세계 교회의 움직임에 동참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한국의 에큐메니칼운동을 이끌어왔다.

강 목사는 독일 전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제커와 더불어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국제적 지원과 협력을 함께 해왔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그의 신앙은 교회와 사회의 벽을 허무는 일에 앞장을 섰지만 그의 창의적인 시도들과 사건들은 기성 교회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다양한 활동과 업적 중에 문화 예술 분야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그 중에서 방송 분야는 더욱 그러하다. 방송윤리위원장, 방송위원장, 방송개혁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방송이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문화 매체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방송의 공정성과 자율성 확보를 위해 끈질긴 노력을 기울여왔다.

강 목사는 무엇보다도 그의 삶을 통해 치열하게 살아간 르네상스적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2000년 이후에는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일에 여생을 바치기로 하고 사단법인 ‘평화포럼’을 설립하고 초당적 협력과 국제 연대를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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