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봄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아니하신 하나님께서 보이는 하나님으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한스 큉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처럼 왕궁에서 자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처럼 왕자도 아니셨습니다. 공자님처럼 현자(賢者)로 행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또한 마호메트처럼 큰 상인도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의 지속적인 비중은 바로 그 출신이 보잘 것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뛰어난 정치인도 아니었고, 위대한 장군도 아니었고, 엄청난 경제인도 아니었고, 훌륭한 종교인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셨습니다."
 
더 친근하게 표현하자면 그냥 우리의 친구이셨습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버림받은 자들처럼 보잘 것 없는 이들의 친구로 오셔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늘 계시면서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사 41:8) 하시면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음성을 우리는 늘 곁에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진리에서 벗어나 있고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음을 나에게 증명해 보인다 할지라도, 나는 진리와 함께 머물기보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기를 선택할 것이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 바울의 친구가 된 사람들

기독교의 역사에서 참으로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은 큰 사람이었던 만큼 인간적인 약점도 함께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순교하기까지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었지만, 정작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는 쓸쓸함을 노년에 고백하리만큼 외로운 그였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 15:10)이라는 그의 감사는 하나님의 보살핌이 없이는 이룰 수 없었던 그의 삶을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번은 안디옥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갈 2:11~14).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다가 할례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서서 물러난 일이 있었습니다. 할례자들에게서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시비를 당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이때 이것을 본 바울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에게 위선 떨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책망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요즘으로 말하면 총회장격이고, 바울은 아득한 후배로 전도사 정도의 위치였는데, 조용히 단둘이 만나서 건의해도 죄송할 노릇인데 공개적으로 정죄하고 나섰으니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울의 비난을 너그럽게 받아들임으로써 초대교회가 분열 없이 건강할 수 있었고, 바울 또한 주의 일을 계속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바울의 책망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서 바울에게 행정적인 제재를 가했다면 바울의 복음 사역은 큰 타격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는 분열로 줄달음질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울의 앞 뒤 가릴 줄 모르는 급한 성격을 포용함으로써-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놀랍게  확장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이 막 시작될 무렵에는 또 이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행 15:36~41). 바울과 함께 전도를 하던 바나바가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마가가 지난 번 밤빌리아에서 이탈한 적이 있는 사람이니 데려갈 수 없다고 고집하여 바나바와 크게 다투고 피차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회심한 후에 주의 일을 하고 싶어 하였으나 아무도 믿지도 않고 초청하지도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 바울을 데려다가 키워 준 은인이 바로 바나바였는데, 그와 갈라선 것입니다. 사람 중심으로 사고하고 실천하는 바나바를 비방하고 나선 것에서, 우리는 일 중심으로 살면서 자기 고집에 매달린 바울의 인간적인 약점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조화를 이룰 줄 모르고 오직 일에 매여 사람에게 상처를 안겨주는 바울을 사도들은 정죄하거나 버리지 않고 감싸고 힘을 모아줌으로써 바울을 바울 되게 하였습니다.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2. 사람의 친구가 되신 주님

삶의 긴 여정에서 실족하여 넘어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많습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기는커녕 그 넘어진 사람을 밟고 지나가는 이기적 충동과 몰인정이 쉽게 목격되고 있습니다. 집단과 집단 사이에도 모든 특권의 근원인 권력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기를 포기하고 있으며, 그것이 새로운 현실주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까치밥이라고 빨간 감 한두 개를 나무에 두는 마음의 여백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남을 먼저 생각하는 영혼의 풍요를 상실한 지 오래입니다. 오직 나만 생각하고 남도 나만 생각하기를 강요하면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벽에 내던진 것만큼 튀어나오는 반작용이 큰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던진 공이 튀어나오면서 자신의 몸을 때리는 고통에 휩싸여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도 그 과정에서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을 잃어버리면, 그 목적이 설사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병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작고 작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지고의 명제 앞에서도 서로의 영혼에 상처를 주는 일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원래 물은 '돌'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얼음이라는 돌은 다른 돌과 달리 아주 작음 열에도 금세 녹아 버리기 때문에 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영광로 속의 고열에서 쇳물이 되는 다른 돌들과는 달리 아주 작은 따스함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얼음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우리의 마음도 본디 그러합니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금언처럼 따스한 사랑의 눈길에 우리는 서로의 가슴에 쌓여 있는 천길 얼음을 녹아내리게 할 수 있습니다. 봄이 따스한 바람으로 죽음을 딛고 생명을 키우듯이, 정지된 얼음 속에서 흘러넘치는 생명의 물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 친구로 오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3. 하늘나라-서로가 서로에게 친구가 됨

왜 세상은 이리도 쓸쓸함과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다들 얼음이라는 돌이 되어 서로 만나서 하나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엄동(嚴冬)의 길목에서 우리는 아기 예수의 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차고 굳어진 마음을 녹여 주실 분, 그리하여 하나님과 손을 잡고 우리 이웃과 손잡게 해 주실 분, 우리의 친구이시며, 우리를 서로 친구 되게 해 주실 분!

친구로 오신 예수님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스승이 제자의 좋은 친구가 된다면 모든 제자는 성공적인 삶을 살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의 좋은 친구가 된다면 스승은 가르치는 보람을 느끼며 헌신할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의 좋은 친구가 된다면 자녀들은 효자가 될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좋은 친구가 된다면 부모는 더 이상 노후에도 소외의 그림자에 가려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좋은 친구가 된다면 남편은 일터에서 밝은 얼굴로 모든 이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좋은 친구가 된다면 아내는 작은 하늘나라의 가정의 원정(園丁)이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목회자의 좋은 친구가 된다면 목회자가 이끄는 그곳이 바로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이 되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의 좋은 친구가 된다면 성도들은 그 목회자에게서 작은 예수 사건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김정명 목사. ⓒ뉴스앤조이

우리, 친구를 찾아 그만 헤맵시다. 우리가 먼저 친구가 되어 줍시다. 보십시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낫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이 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친구 되기를 거절하고 딴 길로 갔을 때,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 그런 모습으로 오셔서 그런 모습으로 사시다 그런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우리와 친구 되는 놀라운 생명의 부활을 보여 주셨습니다.

날마다 그 분은 우리의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고 계십니다. 그러나 날마다 그 분은 우리 사랑의 작은 힘으로 부활하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그러시면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으니, 서로 정죄만 하지 말고 친구가 되어 서로 사랑하라!

김정명 목사 / 은현교회·뉴스앤조이 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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