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듯이, 하나님이 손수 흙을 빚어 만드신 사람은 이 생명의 숨이 담김으로써 비로소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생령, 생기가 부어진 고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창조하신 처음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생명을 부여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동산을 가꾸고 돌보는 과제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동산을 가꾸고 돌보는 과제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사용하여 모든 피조물이 서로 더불어 사는 터전을 마련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대지도, 자연도, 사람도, 하나님의 주신 생기를 잃어버린 채 경쟁하고 지배하여 좀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죽음의 문화로 찌들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고 하였는데 말입니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지식이 뛰어나도 영혼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면 그건 한줌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이듯이 영혼이 떠난 세상의 모든 현상은 삶이 아닌 죽음, 바로 그것입니다.

사회가 병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일에서 예수님의 인간 이해를 배웁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가진 것을 놓고 볼 때 아무것도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할 때 무엇을 가지고 있는 가를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말씀을 전파하며 귀신을 좇아내기 위하여 그들의 맑은 영혼을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말하지 않고 돈이 말하는 세상, 사람다움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돈을 목적으로 삼는 세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적 풍요만을 외치는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건강한 노동과 건전한 부의 축적의 구조가 아니라 호주머니를 넘보고, 남의 생명까지 짓밟으면서 쌓아 올린 거대한 바벨탑 형상으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시작은 이러했습니다. 보릿고개로 굶주리고 헐벗어 기진해 있는 국민들 앞에 총 들고 나선 군사 독재자들이 외친 구호는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발맞춰 모든 국민들은 '잘 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를 군가처럼 목이 터져라 불렀습니다.

경제 부흥을 위해서는 인간의 귀중한 것을 송두리째 희생해도 좋다는 개발 독재가 판을 치면서 명분 없는 월남 전쟁에서 젊은이들을 보내 그들의 핏 값으로 달러를 벌어들여 왔고, 급기야는 기생관광을 통해 젊은 딸들의 정조를 팔아서 엔화를 벌어들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덕분에 국민소득 1만 불이라는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되었지만, 그 배부름을 감당치 못한 채 영혼이 병들고 말았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면서 계층 간의 갈등, 지역 간의 갈등이 치료불능의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수많은 러브호텔은 말할 것도 없고 이용실에서조차 음란, 퇴폐행위가 이루어진다고 하니 성 개방은 선진국을 뺨칠 정도가 되어 우리 사회는 대 파국을 면치 못하리라는 경고를 이미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병들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대교회가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사로잡기 시작하면서 너도 나도 숫자 놀음에 깊이 빠져 교인 수 늘리기, 교회 수 늘이기에 생명을 걸게 되었습니다. 왜 숫자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품에 있는 '아흔 아홉'보다 길 잃은 '하나'를 더 귀히 여기는 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수 관념이어야 하는데, 모두들 그 아흔 아홉에만 정신을 팔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선포하고 사회의 정의와 진리를 외치기보다는 정의롭지 못한 부의 축적에까지 축복의 면죄부를 남발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우리의 이웃 -고통당하는 자,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를 외면하고 오히려 항상 가진 자의 편에 서서 많이 가지면 축복이요 못 가진 것은 저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영혼의 구원을 사모하면서 나오는 사람들보다 축복을 받고 출세하려고 오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을 헌금 몇 푼에 고용하여 해결사로 부리려는 패역한 삶이 회개 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교회 수가 늘고 교인  수가 늘어 가면 당연히 사회가 맑고 아름다워져야 할 텐데, 사회는 교인 수와 상관없이 점점 추해지고 있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육적 숫자 놀음에만 빠졌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는 영혼의 맑은 울림은 사라져 가고, 축복만 메아리치고 있는 빈들에 우리 모두 서 있습니다.

너와 나의 영혼을 사랑합시다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살리는 길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경제도 살릴 수 있고 나라도 민족도 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구하면 그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질서에 동참해야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그렇습니다. 노아 때에 홍수로 모든 인간들이 심판 받아 멸망한 것도 마음의 생각이 육체만을 위하고 영혼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두가 영혼을 잊어버리고 육체의 쾌락만 추구하다보니 마음의 생각들이 추하고 악해져버렸습니다.

이제는 너와 나의 영혼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영혼아, 너 인생을 사랑하라. 내 영혼아 너의 형제의 영혼을 사랑하고 구원하라. 내 영혼아 예수님을 사랑하라. 내 영혼아 성령님을 환영하라. 내 영혼아 성령님을 의지하라”고 한 것처럼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고 소생시켜야 합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치켜 행할찌라"(겔 36:25~27).
 
회개합시다. 물질 있음을 회개하자는 게 아니라 물질 있음만을 최고의 가치기준으로 삼았던 지난날의 삶을 회개하자는 것입니다. 영혼이 병든 경제 제일주의는 우선은 문제가 드러나지 않지만 걷잡을 수 없는 죽음의 공포로 이내 해일처럼 몰려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처럼, 바람처럼, 공기처럼, 산처럼, 바다처럼 언제나 우리 곁에 있던 자연이 일단 병이 들면 우리에게 치명적이듯이, 영혼 또한 그러합니다.

영혼을 잃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

▲ 김정명 목사. ⓒ뉴스앤조이

가장 기쁜 소식과 가장 슬픈 소식은 생명을 얻음과 잃음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면 최고의 기쁜 소식인 생명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을 더욱 사랑하면 우리는 기쁨과 만족이 없이 불평과 불만의 세월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선 가득한 육적인 삶을 회개하지 않아 동생 아벨의 영혼을 살펴 사랑할 수 없었던 가인의 돌멩이를 우리가 가지게 되는 날이 바로 우리의 생명을 잃는 날입니다.

그러니 형제여! 영혼을 보는 눈을 맑게 합시다. 영혼을 깊이 사랑합시다. 그리하여 내 영혼에게 이렇게 말합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김정명 / 여수은현교회 담임목사, 뉴스앤조이 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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